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눈길을 끄는 대목에서는 연필로 줄을 그어가면서 속으로는 내심 '정말일까?' '그가 정말 조선을 먹기 위한 주인 없는 포도밭이라고 생각했을까?'하고 아니길, 정말 아니길 하며 읽어 내려갔다.

 

이 서평을 위해 직전에 읽었던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에 내가 썼던 평을 다시 한 번 봤다. 일단 그가 일본 근대화를 위해 겪었던 일과 생각, 사상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에 대해 찾아본 일부 신문 등을 통해 그에 대한 감정은 부정적이었다. 딸랑 책 한 권 읽고, 신문 몇 개 뒤져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의 조선에 대한 행적이라고 해야 옳겠지)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후쿠자와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내려갔던 김옥균과 박영효에 대해 알아봤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게이오기주쿠에 첫 유학을 다녀온 조선인들, 개화파, 그리고 고종의 외척 민씨들과의 힘겨루기 등 다양한 자료를 살펴봤다. 역사는 합의의 학문이라고 한다. 정설은 정설이고 내 개인을 비롯해 역사를 해석하는 이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 어떤 방식으로든 사실을 미화하거나 혹은 부정적이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그에 대해 행적을 냉정하게 좇고 평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어떨까 싶다.

 

난, 후쿠자와의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역사는 반복이 되니, 요즘 상황에서 보면 한 번쯤 세상을 급진적으로 뒤집고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사상을 꽃피우고, 그러기 위해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 학자와 손잡은 것을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봐서는 그 어떤 문제도, 현실도 해결하기 어렵다. 양국이 서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서로 반성하며 잘 된 점은 서로 배우고, 좋지 않은 점은 고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며 조심해야 한다.

 

일단,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후쿠자와 유키치 하면 가장 대두되는 키워드, 바로 '탈아론'이다. 이 탈아론은 아시아를 삼키고 일본이 서구와 대등하게 관계를 이어가며 세계화를 꿈꾸는 개념하고는 거리가 있다. 그가 탈아론을 제시한 시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후쿠자와는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처음 조선에 관심을 가진 후 조선의 근대화를 소원한다. 왜냐하면, 책에서도 나와있지만,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잠식되어 가던 청나라에 충격을 받은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에서 "청나라는 영국인이 돈을 땅에 던져 줘도, 굽실굽실하며 좋아라 받는다"며 그 비굴함에 의문부호를 찍는다. 인도 역시 현지 사람들이 영국 사람을 높이 떠받치는 것을 보고는 일본은 절대 청나라와 인도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다. 세계 국가들의 양육강식에 희생되지 않고 독립을 이루고, 조선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의 근대화를 지원하고, 연계해 동아시아를 서양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야 한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조선에서의 그 첫 걸음이 강화조약이었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 손잡고 교류를 시작한다. 유정수와 서유견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유길준도 일본 게이오기주쿠 최초 유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일본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민씨 일가들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것은 고종의 밀지도 있었지만 아쉽게 차관을 얻지 못했다. 이후 1884년 12월, 이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삼일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김옥균 등 가족은 모두 처형됐고, 김옥균도 암살당한다. 이를 알게 된 후쿠자와는 '조선독립당의 처형'이라는 제목으로 <시사신보>에 글을 남겨 따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후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수급을 저잣거리에 내거는 행위는 야만적이라며 조선왕조를 비난한다.(실은 민씨 일가가 고종을 조종).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885년 3월 그는 '탈아론'을 주장, '조선'과 '중국'은 낡고 고루한 아시아를 고집해 문명의 길로 들어서길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대로는 조선과 중국은 독립이 어려우며 일본 혼자 아시아를 벗어나 문명의 길로 들어서겠다. 조선은 이웃나라지만 서구의 나라들이 이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청나라와 조선을 대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 것이다.

 

여기서 탈아론의 '아'는 무조건적인 아시아가 아니다. 행간의 의미를 보면 낡고 고루한 전제정치의 아시아를 뜻한다. 조선이 멸망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도 썼다고 나와있는데, 그가 말하는 조선은 곧 '이씨 왕조의 조선'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후쿠자와는 도쿠가와 막부도 깠다. 비굴한 농민이 깨어야 한다면 막말도 했다. 높은 사람에겐 굽실거리고, 낮은 사람에겐 하대하는 것도 깠다. 배우고, 익혀 평등하게 살아가고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건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쿠자와는 공자도,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고루한, 시대에 맞지 않는 한학도 깠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않고 남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한다"는 가르침은 그 당시 폐해를 지적한 것인데 이를 학자들이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 나무토막과 같은 형상이 됐다고 지적한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 <효24>도 깠다. 이를 보면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것들인데, 이런 어리석은 내용이 현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에도시대 중엽 교훈서인 <여대학>의 '삼종지도'와 '칠거'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왜 남성이 하면 무죄고, 여성이 하면 유죄인가? 남성이 부정을 저지르면 여성을 조곤조곤 부드럽게 얘기해야 하고, 어떠한 치욕을 당해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왜 당연시 되어야 하는가?"하며 줄기차게 깐다. 너무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시대에 맞지 않으며, 이것이 근대화를 억누르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후쿠자와는 우리와 철천지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도 깠다. 오히려 후쿠자와는 개개인의 독립이 나라의 독립과 발전 및 근대화로 이어지는데, 이토는 오히려 군국주의로 인해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가 입각을 권유했는데도 후쿠자와는 번번히 거절하고. 결국 딱 한 번 둘이 마주했는데, 그건 후쿠자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이토가 문병차 방문했을 때다.

 

이밖에 책을 읽어보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가 근대화를 위해 남겼던 것, 또는 자국을 위해 힘썼던 내용과 생각을 유추해 반성해 볼 여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쿠자와에 대해 좋지 않는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나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 문제는 냉정하게 바라보고 접근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의 보수가 보수가 아니듯이, 그 당시 조선의 왕조도 왕조가 아니었을 터. 대한제국 당시 민비(이때 신문과 백성들도 모두 민비라 불렀으며 이는 결코 그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가 민씨 외척을 등용하고(전국의 모든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은 관직을 받았을 정도),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이완용을 등용했고, 백성들에게 당시 욕을 많이 먹었던 것도 사실이다. 민비가 죽었을 때 백성 그 누구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매천야록> 기록)

그리고 후쿠자와도 이런 사실을 알고 분개해, 시해에 가담한 낭인과 관료를 체포해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쓴 글이 있다. 그런 민비가 역사적으로 존경해야 할 인물로 둔갑한 것은 김영삼 정부 세계화를 표방하던 시절에 이문열의 <여우사냥>이 시발점이었다. 여담으로 민비는 과도한 민족주의와 반일감정으로 민족의 국모이자 영웅으로 탈바꿈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히려 피흘리며 싸운 독립투사보다 더한 대우와 존경을 받는 아이러니도 보인다. 물론 낭인들 칼에 저참한 죽음을 당한 것은 결코 있었서도, 잊어서도 안 되겠지만, 단순히 일본인 칼에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독립 영웅으로 존경받는 일은 앞으로도 없어야 한다. 우리도 역사왜곡 만만치 않음을 인정하자.

 

여하튼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은 잘 읽었다. 내심 반성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많았던 책. 내가 저 시절에 태어났어도 조선의 지긋지긋한 신분제와 윗대가리들 부정부패에 진절머리가 나 근대화에 앞장섰을 수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일본에 가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에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랑? 전혀 할 수 없다. 지금도 그런데, 그 때는 더 갑갑한 현실이었을 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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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차일드의 e-콘텐츠 블로그입니다. <월간 app> 매거진 편집장입니다. e-컨텐츠 퍼블리싱미디어 <같이만드는가치>도 맡고 있습니다. 《앱스토리》(2012), 《잡지기자 클리닉》(2013), 《인터뷰를 디자인하라》(2016)을 썼습니다. 궁금한 사항은 seoulpol@hanmail.net으로 메일주세요. ^^

 

그간 인문과 일본 관련 서적만 탐독(?)하다 기분 전환 겸 골랐던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패딩턴발 4시 50분>.

예전 한참 즐겨 읽었던 시절의 느낌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고 할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가 20여장이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 범인의 윤곽조차 잡기 힘든 부분은 전적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서술에서 의존해야 했던 상황.

결국 마지막 3장을 남기고서, 증거를 기반으로 한 신빙성 있는 관계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범인이 잡히는 것이 아닌 상황 재연을 통해 목격자가 범인의 윤곽을 보고 "저 사람 범인이에요"하고 지적해 사건을 해결된다.

"저 사람이에요. 기차 안에 있던 그 남자야!"

이렇게 외쳤던 유일한 목격자, 맥길리커디 부인.

여하튼 읽고 나면 앞서 280여 페이지 가량을 할애하가며 범인이 흘렸을지 모를 증거를 모으느라 혈안이 됐던 수 많은 일들, 독자들을 살짝 다른 길로 빠지게 했던 다른 용의자 추리, 그 얽히고설켰던 한 가족의 애환, 그리고, 그 가족을 주요 사건 현장이라고 한정하며, 그 속으로 마플 여사가 알고 있던 수학 수석의 옥스퍼드 대학 졸업생을 잠입시켰던 설정, 과정 내내 거의 역할이 없다가 마지막에 범인 상황 재연으로 알아낼 때 역할만 했던 마플 여사, 만약 이 책이 현대에 나왔다면 글쎄, 추리소설의 기반이 되는 논증과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지 않았을까 한다.

여하튼 이 책은 현대에도 많이 읽히고 있고, 올초 일본에서 스페셜 드라마로 온에어했는데 조금 상황적 설정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크리스티 여사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누명>이 내가 읽었던 그녀의 책 중 톱2를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에 마플 여사는 사형제에 대해 소소하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사형제도를 폐지했다는 게 아주아주 유감스러워요. 교수대에 매달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OOOO일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에요"

그랬구나. 책 곳곳에도 마플 여사는 물론 저자들의 생각이 녹아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도 독서의 장점.

 

다음에는 여러 번 읽다 말았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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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이렇기 때문에 심오하고도 무섭고, 대단한 자산이 되는 듯하다. 행간을 읽어내려가다보면, 눈길을 끄는 키워드나 인물, 혹은 언급된 소재나 도서를 찾아 그 끈을 다시 잇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독서의 힘이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미 수년 전에 한 번 읽고, 일본 여행 관련해 읽었던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를 읽어 내려가면서부터 였다. 1독 때 무심코 지나쳤던 내용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책 66페이지 하단에 '육식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중간제목의 한 챕터가 소개된다. 여기서 저자 오카다 데쓰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육식 추진의 또 다른 공로자는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후쿠자와는 1870년 쓰키치 우마회사로부터 선전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1,300자 분량의 '육식을 말한다'를 작성, 영양학적인 관점에서 육식과 우유의 효용을 강조했다. 마침 그 시기가 육식을 적극 권장한 메이지 유신, 문명개화(일명 문화)와 독집자존, 서양문물 적극 수용,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시기와 궤를 같이 하기에 <돈가스의 탄생>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사실, 자서전을 읽어가면서 그의 자세한 내막을 알기 전까지는 막연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일본의 근대화와 계몽주의에 앞장선 인물, 서양문물을 처음 받아들이고, 게이오 대학을 설립했으며, 1862년 스물 아홉의 나이로 유럽사절단에 통역관으로 파견되면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러시아, 포르투갈 등 여섯 나라를 순방, 이것이 훗날 '독립자존'의 사상을 발전하게 된다. 곧, 탈아론의 시작이었다. 나중에는 이것이 변질이 된다. 하지만 자서전에는 그런 내용은 없다. 나중에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역사비평사)를 통해 그의 민낯이 밝혀져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게 된다.

 

당시 하급무사였던 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나 신분의 벽을 뼈저리게 느끼고, 봉건제의 폐해를 절감한 후쿠자와는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난학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보고 영어를 배우며, 서양문물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교육과 번역, 출판, 신문사 경영에 나서면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이것이 훗날 게이오 대학의 엠블럼이 된다.

 

책에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생겼던 에피소드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다. 시가와 슈가를 구분하지 못해 설탕을 사오기도 하고, 일본 의사가 인삼으로 생각하고 사 온 것이 생강가루이기도 했다는 것.

 

나름 유럽 순회 중에 궁금했던 웬만한 것은 원서를 찾아 알아냈지만, 그중에서도 병원 유지비는 어떤 식으로 누가 내며, 은행에서의 돈의 출납은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 유편법이 시행되고 있는데 그 법은 어떤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프랑스 징병제는 어떤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정치상의 선거법은 무엇이며, 국회는 어떤 관공서인지 하고 말이다. 

 

신을 부정하는 얘기도 언급된다. 신의 이름이 적힌 부적을 밟으면 정말 벌을 받을까? 하는 생각에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이를 밟아봤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시 변소로 가져가 밟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신기한 것을 밝혀낸 기분이 들어 뿌듯하기도 했다고 한다.

 

책의 중간 중간에 보면, 도쿠가와 막부와 관료가 답답했는지 까는 얘기도 나온다. "지금의 막부는 무너져야만 한다"느니 "도쿠가와 정부를 판단하자면 칭찬할 부분이라곤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막부의 양이주의의 반감이 심했던 모양이다. 또 일본 최초로 수업료와 월급 개념을 탑재해 전국으로 확대시켰고, 돈주고 배우고, 싫으면 잡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으로 자리잡기 된다.

 

일본의 순사라는 단어의 시작도 후쿠자와와 연이 있다. 그가 갖가지 원서를 모아 경찰법에 대한 부분을 번역해 책을 엮은 뒤 도쿄부에서는 제번 병사들의 순찰을 중지하고, '순라'를 조직해 이것이 훗날 '순사'로 개명됐단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를 이어 받아 말단 '순경'이 탄생했다. 학교 내에서는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 굳이 경례를 붙이지 말고, 간단히 목례만 하고 빨리 움직이는 것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허례허식을 없앤 것이다. 

 

하지만 그도 늘 암살걱정에 시달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쇄국과 양이론을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나름 개화파들은 종종 대낮이나 밤에 암살을 당하기도 했는데, 후쿠자와도 마루 밑에 도피처를 만들기도 하고, 밤늦게는 외출을 삼가기도 했다고 한다(무려 12~13년간).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양학 동료들과 모여 얘기를 나누다 자정이 되어 헤어졌는데, 저 멀리 어두운 골목에서 누가 빠르게 다가오더란다. 후쿠자와는 이미 돌아서 도망가기엔 늦었다고 판단해 적극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둘이 서로 엇갈리는 찰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상대방도 서둘러 뛰어 도망가더란다. 즉, 둘 다 밤늦게 겁먹고 서로 오해를 부른 것이다.

 

그는 농민에 대해서도 질타를 하고 있다. 즉, 상대에 따른 태도변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농민(백성) 측에서 압제를 자초하는 면이 있다는 식이다. 우연히 그는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 몇 가지 시험을 해보고자 마음 먹는다. 처음에는 아랫사람 하대하듯 묻자 굽실굽실 친절히 안내는 농민, 그 다음 만나는 농민에게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묻자 오히려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았다고. 다시 다음 사람에게는 하대하듯 물으니 역시 친절히 답하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맺은 결론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도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책의 끝에가서는 조선인을 돈만 밝힌다거나 중국인은 문명개화가 무익하다는 글도 나온다. 중국인 비하라기 보다는 한학과 유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과 비판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의 구술로 작성된,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일 뿐 참고만 하면 그 뿐이고, 당시 근대화를 위한 시대적 상황과 세밀한 근대화 움직임을 살펴 당시 조선과 비교해가며 반성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앞서 잠시 얘기했지만,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계몽주의의 대부로 일컬어지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실은 전후 일본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이미지를 탈색했다는 것이 바로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전쟁과 조선침략의 음모와 흉계를 갖췄으며, 실제로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 "조선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있는 병자와 같다" "조선과 중국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해 도덕마져 땅에 떨어진 데다 몰염치는 극에 달해 오만방자하다" "일본 외의 국가가 조선을 먹게 해선 안 된다. 일본이 조선을 독차지 해야 하며, 이는 일본의 권리이자 의무" 등의 막말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후쿠자와를 미화한 인물은 바로 마루야마 마사오 도쿄대 교수. 일단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의 이 충격적인 발언과 책은 후쿠자와에 집단최면이 걸렸던 일본 국민을 지금도 하나 둘씩 깨어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1만엔 주인공 인물은 여전히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조선에서 터졌던 갑신정변으로 누가 일본에서 체포됐는데, 그 관병들이 자신의 집도 뒤졌다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분명 후쿠자와는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주인공인 김옥균을 만나 금전적으로 지원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이를 세세히 자서전에서 밝히지 않고 있다.

 

어떤 분의 블로그에는 후쿠자와가 조선의 멸망을 반겼다는 건,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조선왕조가 멸망해야 백성의 안위가 평안해지리라는 뜻일 것이라는 데,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는 조선의 멸망을 수구적인 관점에서 침탈하려는 의욕과 탈아적인 입장에서 아시아를 먹고 서양과 맞장 뜨기 위해 조선을 먹기 위한 정치적 야심이 가득한 발언이라고 해석한다.

 

여러가지로 배우고, 느끼고, 암울하고, 여전히 발전 없는 한국의 정치사를 보며 이 책을 덮는다. 다음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학문의 권장>을 비판섞인 눈으로 읽어내려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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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즐겨먹는 커리. 흔히 카레라고 부른다. 우리가 먹는 카레는 일본식이다. 돈가스와 단팥빵 등 일양절충식의 대가인 일본이 역시 영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커리를 자신들의 기호에 맞춰 다시 밥에 부어 먹는, 보다 단맛이 강하고 부드러운 커리를 카레로 발음했고, 우리도 그대로 카레라 부르고 있다.

 

정작 커리라는 말은 소위 카레를 지칭하지 않는 폭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커리를 '카릴' 혹은 '카리'라고 불렀고, 이 요리는 채소와 고기를 기름에 볶은 매콤한 요리를 가리켰다.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커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음식마다 코르마, 로간 조시, 몰리, 도피아자 등 특정 이름을 붙여 사용했단다.

 

여하튼 강황과 강한 향신료를 고기 및 채소를 섞어 만든 커리는 당시 식민지배를 해왔던 영국에 전해지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요리책과 이민자들, 동인도회사 관료와 부인, 계약직 노예 등이었다. 이들은 또 영국으로 흘러가 그곳의 전통 식문화와 결합한 독특한 커리를 개발해 또 하나의 음식문화를 이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저번 <돈가스의 탄생>도 그렇고, 이번 <커리의 지구사>도 그렇고, 그 중심에는 다양한 요리법과 음식문화를 소개한 <요리책>이 두루 전해지면 발달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직업훈련소도 존재했었고, 여기에 종사하던 한 직원이 서양빵조시라를 만나면서 6년여의 개발 끝에 '단팥빵'을 개발하지 않았는가. 요리책을 통해 돈가스와 단팥빵 등 다양한 요리법이 전수되며 곳곳으로 퍼졌고, 그만큼 음식문화를 발달에 발달을 거듭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커리는 영국에서 변형되고 또 변형되며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요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나아가 일본 등에도 두루 전파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사실, 15세기 후반에 포르투갈이 향신료 교역을 장악하던 때, 이 교역소를 중심으로 '콜럼버스 교환'이 이뤄지면서 서양의 고추가 인도 지역으로 흡수돼 더욱 맵고 향이 강한 커리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책에서 인도가 향신료를 즐기는 관습이 자리잡게 된 이유에 대해 "향신료에는 강한 상생제 구실을 하는 화학성분이 있어 음식을 상하지 않도록 박테리아와 세균을 죽이거나 억제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러한 항생제가 마늘과 양파와 어우러졌을 때 그 효과가 더욱 컸다고 한다. 또한 향신료의 가치도 언급하고 있는데, 향신료의 요리학적 가치는 요리에 맛과 질감, 깊이를 더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가난한 이들은 적은 비용으로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후 커리는 영국은 물론 미국과 주변국으로 널리 퍼졌고, 영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으로까지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는 아이러니. 그도 부정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인도가 먹었던 커리와는 다르게 변형해 자신들의 음식문화에 맞춰 진화했으니 일본하면 돈가스와 같은 취지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 부록에는 다양한 커리 요리법이 옛날 요리책에 맞춰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1900년대 초반부터 조선에서도 카레를 먹었던 신문기사를 소개하고 있어 새로웠다. 그리고 1925년 4월 8일자 <동아일보>에는 <서양 요리 제법, '카레라이스' 만드는 법>을 짧게 토막으로 소개하는 이미지도 볼거리다.

 

다만, 책의 많은 부분이 각국에 퍼져있는 카레소개와 요리책 출처에 할애해 자칫 지루하고 고루해질 수 있다는 것은 단점. 이 점이 앞서 2014년에 1독했고, 얼마 전 다시 2독했던 <돈가스의 탄생>과 비견되는 점이다. 총 9개의 챕터 중에 커리란 무엇인가, 제국의 향수, 영국의 커리, 식문지 커리의 발자취,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 등 4개 챕터 외에는 대제목과 소제목만 훑어봐도 좋을 성 싶을 정도였다.

 

여하튼 이날 이 책을 읽으며, 마트에 가서 카레를 맛과 브랜드 별로 구입해 집에 진열했다. 그리고 하나를 까서 밥에 부어 먹었다. 음식의 맛은 그 역사를 알 때 더 혀로 느낄 수 없는 맛까지 느낄 수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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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차일드

허니문 차일드의 e-콘텐츠 블로그입니다. <월간 app> 매거진 편집장입니다. e-컨텐츠 퍼블리싱미디어 <같이만드는가치>도 맡고 있습니다. 《앱스토리》(2012), 《잡지기자 클리닉》(2013), 《인터뷰를 디자인하라》(2016)을 썼습니다. 궁금한 사항은 seoulpol@hanmail.net으로 메일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