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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전 6권_하라 모모요(원 백대) 저, 1986년 발행

   

 

측천무후. 언제고 꼭 한번 제대로 읽고 싶은 욕심이 있던 차였다. 중국의 3대 악녀(서태후, 여태후, 측천무후) 중 한 명이 아닌가.

 

그래서 내 취향인 그때 그 시절(?) 책을 찾아 읽어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난 옛날 고려원이나 동서출판사, 해냄, 배영사, 김영사 등의 오래된 책 냄새가 좋더라. 바로 북코아에서 측천무후와 관련한 책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중국 작가가 쓴 현지 번역물을 타깃으로 했다. 그런데 암만 찾아도 눈에 잘 띄지 않더라. 그러던 중 동아서원에서 1986년에 발행한 책을 찾게 됐다. 저자 이름도 역시 한자로 되어 있었다. 이름하야 원백대(原百代). 첨에 중국 사람, 그리고 남자인 줄로만 알았다. 아, 이거다 싶어 바로 주문 완료. 혹시나 해서 블로그를 찾아보니 그 당시 나온 책 치고 후기도 많았고, 네이버 신문검색을 해보니 당시 신문광고도 했다는 사실.

 

책을 펼쳤다. 우선 책을 읽기 전에 나의 오래 축적된 고정관념부터 제거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작가의 기획의도를 밝힌 <책머리에>를 유심히 읽었다. 책 날개와 표4(책 마지막 뒷표지)에 써내려간 카피(슬로건)도 눈짐작해뒀다. 작가가 이 책을 쓴 의도는 무엇일까 궁금했으니까. 그래서 '악녀'라는 편견을 없애고 순수 여백의 공간을 채워보자는 심산으로 읽어 내려갔다.

 

 

작가는 책날개에서 "측천무후, 그녀는 누구인가?"라며 독자에게 화두를 던진다. 그러고선 '한낱 비천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태종의 후궁에 입궐해 태종 붕어 후 한때 비구니가 됐으나 고종을 유혹해 총애를 입고 황호를 참소 실각시킨 후 여황제로 등극한다'며 '하급 출신의 혹리들을 곁에 두고 대신이나 문벌 귀족 원로들도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하면서, 한편으로는 과거제도를 두어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문벌에 관계없이 대거 등용하고 혁신정책을 펼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300여 년 전 이미 민중을 의식한 남녀평등과 언론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측천무후는 당을 폐하고 주 제국을 창성, 스스로 성신황제라 칭하고 명실상부한 여황제로 등극한다'면서 '중국 역사가들에 의해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라며 그동안의 알려진 악녀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 우리가 알고 있던 측천무후는 악녀, 즉 자신이 황제라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딸과 아들을 죽이고 수많은 외척과 문벌귀족을 처참히 제거한 인정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황제였다. 그러나 작가의 또 이와 같은 또 다른 시각은 충분히 내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속으로 '그래, 어떤 내용으로 측천무후 이야기를 펼쳐가고, 어떠한 정책을 펴나갔는지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한장 한장 펼쳐나가는 순간, 측천무후 뿐 아니라 그와 관련한 주변과 국제정세, 궁궐 환경 등 많은 이야기가 서사적으로 펼쳐진다.

 

측천무후는 14세 때 당나라 태종(이세민)의 궁녀로 뽑혀 입궁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고종의 후가 되기까지 2대에 걸쳐 대권을 장악한다. 물론 그 과정은 짐작대로 피와 모함 등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악녀, 마녀라는 악명까지 오르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단어는 사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사용하며 실제로 중국에서는 무칙천(武則天)이라야 뜻이 통한다고 한다. 또한 측천무후의 측천이 원래 발음상으로는 칙천이 되어야 하지만, 그간 국내에 오래 통용된 사례를 들어 측천무후라고 한다고.

 

 

이 책은 단순히 측천무후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만을 열거하지 않는다. 고대 궁증 생활과 의식, 복장, 직제, 계급의 호칭과 역사의 수많은 인물 등 우리가 전혀 몰랐던 당대의 사실을 역사처럼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다보면 원래 이 책이 가진 소설의 느낌보다는 하나의 역사서를 대화형식으로 풀어서 읽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중간제목이 들어가는 부분이 여타 소설처럼 수십 장에 걸쳐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한장, 길게는 서너장에 걸쳐 에피소드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짧은데 의미가 통할까? 싶지만, 반대로 군더더가가 거의 없다. 철저하게 사실만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6권에 작가는 집필 후기를 읽어보니 철저히 역사 사료를 기반으로 하되, 구성만 소설 형식을 차용한 것이었다.

 

"이 실록, 대 드라마는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비롯해 수많은 사료와 그 후에 쓰여진 귀중한 저작을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연구한 끝에 보다 힙리적으로, 또한 심리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 스스로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여러 자료를 추려낸 후 마침내 소설로서 골격을 갖췄다"

 

바로 이것이었다. 보통 역사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이 소설상의 내용일 뿐인지, 역사 사료를 기반으로 재해석한 건지 구분할 때가 많다. 대하드라마는 또 어떤가. 드라마일 뿐이라는 전제로 많은 역사왜곡이 일어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볼 때 역사드라마는 적어도 인물관계나 당시 국제정세 등은 허구성을 배재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그러한 문제 때문에 원작자들과도 많은 소송 시비가 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측천무후는 비단 악녀만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아니 악행만을 하지 않았다. 무후는 자신의 실리만을 챙기는 문벌귀족을 멸하고, 대신 여러 신하들에게 고리타분한 유교에 입각한 비현실적인 의견이 아닌 실제 유효하고 실용적인 의견을 채택했다. 또한 참된 정치적 실력을 갖춘 자를 우대했고, 신분에 관계 없이 능력에 따라 승진시키기도 하는 한편, 천후 12개조를 발표했다. 천후 12개조는 대략 농민 우대 정책, 하층 사회의 복지, 하급관리의 건의 수용, 여성의 평등, 같은 계급의 월봉 격차 해소 등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정책이었고, 그만큼 문벌 귀족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저자인 원백대는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여자 작가였다는 사실. 어쩐지 작가소개에 '1912년 東京에서 태어나... ' 이렇게 소개되어 있어 알아차리지 못했다. 원백대, 즉 일본 이름으로 '하라 모모요'였다. 이 책을 쓰던 때 작가의 나이는 50대. 소녀시절 여학교(지금의 중학교) 시절 동양사 교과서에 분명히 여황제임에도 무후라고 나와 있어 궁금해 하던 찰나 이를 언제고 작품화하겠다고 다짐했다고. 이를 쓰기 위해 직접 중국어 공부를 하고 마침내 관계 문헌을 원문으로 독파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 원동력으로 사료를 중심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으니 내용의 깊이야 오죽하랴.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국회도서관과 기타 도서관, 고서방 등 4년여 동안 찾아다녔고, 끝내 대학노트 27권에 가득히 방대한 자료를 섭렵했다. 기타 내용과 복사물까지 더한다면 그 몇 배는 더 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무측천을 작품화하기로 생을 건 이후 4년간 어학 독습, 자료 수집, 연구 분석 후 3년 간에 걸쳐 마침내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

 

전에 읽었던 김성한 선생님이 임진왜란을 소재로 다룬 <7년 전쟁>이라는 책 서문에 이렇게 나와 있다.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을 해도 모자라다'고. 지금 정부의 안팎 논란을 보며 그 말이 가끔씩 뇌리에 스치곤 한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 설민석 강사의 말대로 옛 선조는 우리에게 지혜를 구하라라고 역사서로 보여주고 있지만 참으로 달라지는 것 없이 답습하기만 하니이 무슨 도플갱어 같은 짓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울 때 역사를 더욱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