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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전4권_ 정비석 저

 

누구나 한 번쯤 관심 갖고 읽어볼 만한 책인 <손자병법>. 대학 시절 고려원 판을 읽다가 중간에 읽지 않고 처리했던 기억.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시간을 앞지르고, 마침내 정비석 씨의 <손자병법> 세트를 구매했다. 독서기간은 대략 2주 정도.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말하듯,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손무(기원전 545~470으로 추정)가 처음 전국시대의 명 격전지를 뚜벅뚜벅 다니며 손자병법의 책을 저술하는 과정과, 오자서와의 운명같은 만남으로 인해 함께 오나라의 재상으로서 정치를 하던 이야기, 그리고 정치에 손을 뗀 후의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추가로 손무의 손자로 알려져 있는 손빈과 방연과의 악연의 시작과 그 끝의 이야기(마릉도 계속의 전투)로 끝을 맺고 있다.

 

보통 정비석 씨의 소설이라고 하면 삼국지와 초한지를 꼽는데, 재미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말이 많은 편이다. 그의 책을 읽어본 이들은 하나같이 이야기가 한 번씩 곁가지로 빠져 안드로메다로 흐른다는 평이 주를 이루고, 고증을 철저히하지 않아 이야기 전개가 구멍이 쑹쑹 뚫려있다는 점을 꼽는다.

 

 

 

하지만, 이번 <손자병법>은 내 주관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야기 전개와 고증에서 크게 문제삼을 만한 부분은 없어 보인다. 혹시나 <삼국지>나 <초한지>처럼 이야기가 너무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혹시 오자서의 죽음을 다르게 익히 알려져있는 사료와 달리 가지나 않을까? 손무의 죽음도 작가의 상상에 너무 맡기지는 않을까? 하고 염려했지만 최대한 사료에 나와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오나라를 멸망까지 몰고간 서시와 범려(월나라 재상)와의 관계도 충분히 상상력으로 뒤집을 만한데도 이 역시 최대한 알려져있는 대로 다랐다.

 

하지만 역사 고증이 활발한 이때, 작가의 잘못이라기 보다도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버젓이 나와 있어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부차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와신(臥薪)하고, 월나라 구처가 곰의 쓸개를 핥으며 원한을 잊지 않는다는 뜻의 상담(嘗膽)은 원래 상담만 존재하고, 와신은 없는 얘기란다. 책에서는 자꾸 와신상담이 거론된다.

 

또 하나, 손무와 손빈의 관계는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책에서는 손빈이 손무의 직계 손자로 거론되며 손무의 손자병법을 손빈이 이어받아 저작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학자 다수는 손무 사후 100년이 지난 후에 손빈이 태어나므로 이는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손자병법> 역시 손빈이 함께 저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힘을 싣고 있다.

 

여하튼 이것은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기억남는 몇 가지를 간략히 거론하자면,

역사가 말해주듯, 한 조직의 리더가 방탕하거나 현재에 안주하게 되면 그 조직은 망한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 또, 사람에 따라 고생은 함께 할 지언정, 영화는 함께 누리지 못하는 이도 있다는 것.

 

또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성어도 기억에 생생히 남았다. 쓸데 없는, 혹은 어리석은 자비심이나 동정을 일컫는 말로 그 끝은 아무 의미없는 대의명분으로 도리어 자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일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너무 착하다, 착하다, 혹은 마음 약한 결정력 때문에 마지못해 넘어갔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또 이런 얘기도 나온다. 석요리라는 노인이 오나라와 오자서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기꺼이 희생하지만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가족을 죽여가면서 남을 위한 것이 인이냐, 신왕을 구해 구왕의 아들을 해한 것의 의냐, 내 몸을 손상시켜가면서 남을 위해 일한 것이 지냐"하고 말이다. 회사를 우해,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 인생과 가족이다. 이들을 희생하면서 대의를 위해 일한 데도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반문해본다.

 

 효빈(效顰)이라는 단어도 재밌다. 앞서 오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서시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때부터 가슴이 아플 때마다 손을 데고 눈을 찡끗거렸는데, 그 모습이 차마 예뻤던 모양이다. 이윽고 동네 시집 가지 않은 여인들이 모두 이를 이유도 모르게 흉내내게 되는데, 이에 빗대 '맥락도 모르고 남을 함부로 흉내낸다'는 뜻의 단어다.

 

 

마지막으로, 책의 마지막 권 하단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손무가 조용히 읊조리는 혼잣말이다.

"백년도 살지 못하고 죽으면서,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하나 밝힐 것이 있다. 바로 작가 정비석 씨에 대해서다. 최근까지도 몰랐던 사실인데, 모 포털에서 작가 이름을 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검색된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일제의 정책에 협력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다.

 

1940년 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육군지원병훈련소를 체험한 후 '조선의 청년들이 모두 체험하면 조선에는 광명이 비칠것이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국민문학》(43.4)의 〈국경〉이라는 수필에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은……이 내 나라 일본밖에 ……이 지구상의 단 한 곳의 낙원……조국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로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였다.  정비석 [鄭飛石] (두산백과)

 

이 때문에 작가가 책에 담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 등 메시지를 접할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 책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냥 소설로서, 내가 취할 부분만 취하면 되는 건지, 아니면 그의 저작물 모두를 철저히 배척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