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ing Man

학문의 권장_후쿠자와 유키치 저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눈길을 끄는 대목에서는 연필로 줄을 그어가면서 속으로는 내심 '정말일까?' '그가 정말 조선을 먹기 위한 주인 없는 포도밭이라고 생각했을까?'하고 아니길, 정말 아니길 하며 읽어 내려갔다.

 

이 서평을 위해 직전에 읽었던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에 내가 썼던 평을 다시 한 번 봤다. 일단 그가 일본 근대화를 위해 겪었던 일과 생각, 사상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에 대해 찾아본 일부 신문 등을 통해 그에 대한 감정은 부정적이었다. 딸랑 책 한 권 읽고, 신문 몇 개 뒤져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의 조선에 대한 행적이라고 해야 옳겠지)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후쿠자와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내려갔던 김옥균과 박영효에 대해 알아봤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게이오기주쿠에 첫 유학을 다녀온 조선인들, 개화파, 그리고 고종의 외척 민씨들과의 힘겨루기 등 다양한 자료를 살펴봤다. 역사는 합의의 학문이라고 한다. 정설은 정설이고 내 개인을 비롯해 역사를 해석하는 이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 어떤 방식으로든 사실을 미화하거나 혹은 부정적이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그에 대해 행적을 냉정하게 좇고 평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어떨까 싶다.

 

난, 후쿠자와의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역사는 반복이 되니, 요즘 상황에서 보면 한 번쯤 세상을 급진적으로 뒤집고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사상을 꽃피우고, 그러기 위해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 학자와 손잡은 것을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봐서는 그 어떤 문제도, 현실도 해결하기 어렵다. 양국이 서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서로 반성하며 잘 된 점은 서로 배우고, 좋지 않은 점은 고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며 조심해야 한다.

 

일단,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후쿠자와 유키치 하면 가장 대두되는 키워드, 바로 '탈아론'이다. 이 탈아론은 아시아를 삼키고 일본이 서구와 대등하게 관계를 이어가며 세계화를 꿈꾸는 개념하고는 거리가 있다. 그가 탈아론을 제시한 시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후쿠자와는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처음 조선에 관심을 가진 후 조선의 근대화를 소원한다. 왜냐하면, 책에서도 나와있지만,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잠식되어 가던 청나라에 충격을 받은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에서 "청나라는 영국인이 돈을 땅에 던져 줘도, 굽실굽실하며 좋아라 받는다"며 그 비굴함에 의문부호를 찍는다. 인도 역시 현지 사람들이 영국 사람을 높이 떠받치는 것을 보고는 일본은 절대 청나라와 인도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다. 세계 국가들의 양육강식에 희생되지 않고 독립을 이루고, 조선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의 근대화를 지원하고, 연계해 동아시아를 서양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야 한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조선에서의 그 첫 걸음이 강화조약이었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 손잡고 교류를 시작한다. 유정수와 서유견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유길준도 일본 게이오기주쿠 최초 유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일본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민씨 일가들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것은 고종의 밀지도 있었지만 아쉽게 차관을 얻지 못했다. 이후 1884년 12월, 이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삼일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김옥균 등 가족은 모두 처형됐고, 김옥균도 암살당한다. 이를 알게 된 후쿠자와는 '조선독립당의 처형'이라는 제목으로 <시사신보>에 글을 남겨 따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후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수급을 저잣거리에 내거는 행위는 야만적이라며 조선왕조를 비난한다.(실은 민씨 일가가 고종을 조종).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885년 3월 그는 '탈아론'을 주장, '조선'과 '중국'은 낡고 고루한 아시아를 고집해 문명의 길로 들어서길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대로는 조선과 중국은 독립이 어려우며 일본 혼자 아시아를 벗어나 문명의 길로 들어서겠다. 조선은 이웃나라지만 서구의 나라들이 이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청나라와 조선을 대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 것이다.

 

여기서 탈아론의 '아'는 무조건적인 아시아가 아니다. 행간의 의미를 보면 낡고 고루한 전제정치의 아시아를 뜻한다. 조선이 멸망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도 썼다고 나와있는데, 그가 말하는 조선은 곧 '이씨 왕조의 조선'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후쿠자와는 도쿠가와 막부도 깠다. 비굴한 농민이 깨어야 한다면 막말도 했다. 높은 사람에겐 굽실거리고, 낮은 사람에겐 하대하는 것도 깠다. 배우고, 익혀 평등하게 살아가고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건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쿠자와는 공자도,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고루한, 시대에 맞지 않는 한학도 깠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않고 남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한다"는 가르침은 그 당시 폐해를 지적한 것인데 이를 학자들이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 나무토막과 같은 형상이 됐다고 지적한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 <효24>도 깠다. 이를 보면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것들인데, 이런 어리석은 내용이 현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에도시대 중엽 교훈서인 <여대학>의 '삼종지도'와 '칠거'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왜 남성이 하면 무죄고, 여성이 하면 유죄인가? 남성이 부정을 저지르면 여성을 조곤조곤 부드럽게 얘기해야 하고, 어떠한 치욕을 당해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왜 당연시 되어야 하는가?"하며 줄기차게 깐다. 너무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시대에 맞지 않으며, 이것이 근대화를 억누르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후쿠자와는 우리와 철천지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도 깠다. 오히려 후쿠자와는 개개인의 독립이 나라의 독립과 발전 및 근대화로 이어지는데, 이토는 오히려 군국주의로 인해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가 입각을 권유했는데도 후쿠자와는 번번히 거절하고. 결국 딱 한 번 둘이 마주했는데, 그건 후쿠자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이토가 문병차 방문했을 때다.

 

이밖에 책을 읽어보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가 근대화를 위해 남겼던 것, 또는 자국을 위해 힘썼던 내용과 생각을 유추해 반성해 볼 여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쿠자와에 대해 좋지 않는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나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 문제는 냉정하게 바라보고 접근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의 보수가 보수가 아니듯이, 그 당시 조선의 왕조도 왕조가 아니었을 터. 대한제국 당시 민비(이때 신문과 백성들도 모두 민비라 불렀으며 이는 결코 그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가 민씨 외척을 등용하고(전국의 모든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은 관직을 받았을 정도),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이완용을 등용했고, 백성들에게 당시 욕을 많이 먹었던 것도 사실이다. 민비가 죽었을 때 백성 그 누구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매천야록> 기록)

그리고 후쿠자와도 이런 사실을 알고 분개해, 시해에 가담한 낭인과 관료를 체포해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쓴 글이 있다. 그런 민비가 역사적으로 존경해야 할 인물로 둔갑한 것은 김영삼 정부 세계화를 표방하던 시절에 이문열의 <여우사냥>이 시발점이었다. 여담으로 민비는 과도한 민족주의와 반일감정으로 민족의 국모이자 영웅으로 탈바꿈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히려 피흘리며 싸운 독립투사보다 더한 대우와 존경을 받는 아이러니도 보인다. 물론 낭인들 칼에 저참한 죽음을 당한 것은 결코 있었서도, 잊어서도 안 되겠지만, 단순히 일본인 칼에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독립 영웅으로 존경받는 일은 앞으로도 없어야 한다. 우리도 역사왜곡 만만치 않음을 인정하자.

 

여하튼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은 잘 읽었다. 내심 반성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많았던 책. 내가 저 시절에 태어났어도 조선의 지긋지긋한 신분제와 윗대가리들 부정부패에 진절머리가 나 근대화에 앞장섰을 수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일본에 가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에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랑? 전혀 할 수 없다. 지금도 그런데, 그 때는 더 갑갑한 현실이었을 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