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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ㅡ유홍준 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

저자
유홍준 지음
출판사
창비 | 2013-07-29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유홍준 교수가 전하는 일본 속 한국문화! 새롭게 재해석된 일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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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모처럼 서점에 들러 읽고 싶은 책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일본(문화)는 내게 끊임 없는 재미와 흥미, 콘텐츠를 주는 놀이터였다. 일본음악, 일본드라마, 일본야구, 일본 전국시대 무사도 등 가깝고도 먼 나라, 비슷하지만 이질적인 특성이 나를 더욱 자극했고, 보면 볼수록 참으로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인듯 싶다.

 

사실 이 책을 고르기에 앞서 '국화와 칼'에 눈이 갔다. 그 책은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스가 1944년 미 국무성의 요청으로 자신이 직접 일본을 연구해 쓴 책이다. 그것도 일본을 직접 가보지도 않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 책은 지금까지도 일본, 일본인을 가장 잘 묘사하고 가깝게 연구한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나는 그 책을 다음으로 기약하고 이 책과 <돈가스의 탄생>(오카다 데스 저, 뿌리와이파리)을 구입했다. 돈가스의 탄생 속에는 다양한 일본음식이 나오는데, 그중 근대 일본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돈가스를 빗대, 돈가스가 탄생하기까지 질풍노도의 드라마와 같았던 음식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하는 데 수월하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을 펴면, 저자 유홍준 교수가 하고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무조건 일본문화를 배척하고 얕보지 말고,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고, 한국문화 역시 우리 스스로 제대로 숙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읽다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반성할 일이 태반으로 등장한다. 자랑스러운 문화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스스로 발전, 계승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과 안일함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따끔하게 들린다.

 

책을 처음 펼치면 일본문명이 시작되는 '조몬인'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 설명을 위해 일본 '요시노가리' 지역에 대한 답사가 먼저 나온다. 요시노가리 역사문화공원은 일본이 자신들의 문화유적 보존에 대해 얼마나 열과 성을 다 하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이 공원은 약 2,300여년 전 고조선과 삼한 시대 사람들이 집단이주해 청동기 문명과 벼농사를 전해줌으로써 일본 역사에서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 전~기원 후 3세기까지 600년의 시간)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의 긴 여행에서 일본에 도달한 구석기인들은 남쪽에서 올라오기도 하고, 또 북쪽에서 내려가기도 했다. 그때 일본은 섬이 아니었다. 그러다 1만 5,000년 전 마지막 빙하가 물러가고 해수면이 몇 십 미터나 올라오면서 일본 열도가 서서히 대륙에서 떨어져나가 섬이 됐다. 이리하여 이들은 그 섬에 고립돼 살아간다. 다행히 일본열도는 자연물산이 풍부했다. p30

 

그러면서 일본의 문명 발달이 늦었던 이유가 바로 그 풍부한 자연물산이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이지고잉(Easy-Going, 만족, 나태함 등)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들이 바로 조몬인이었는데, 이렇게 수렵한 물고기나 열매를 담거나 그들의 신앙을 나타내는 토기를 만드는 데만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을 뿐, 문명발달이 그 만큼 더뎠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 무렵 야요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벼농사를 지을 줄 알았고, 식량을 비축하며, 청동기라는 문명적인 금속기를 사용해 취락생활을 했다. 이 대를 야요이시대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바로 우리나라 경상도의 변한, 진한 시대와 같은 세형동검과 청동방울, 민무늬토기, 반달칼, 낫의 출토가 증거가 된다. 그들 야요인이 일본의 토속민이었던 조몬인을 지배하며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그러한 야요이시대(조몬시대 직후) 마을이 갑자기 없어져버린 것이다. 생활토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점으로 미뤄, 침략은 아니라고 저자는 예상하고 있다. 홍수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생활물품이 모두 떠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불도 아니었다. 미스터리다. 말 그대로.

 

따라서 일본 요시노가리 문화유적공원 답사는 바로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이자 우리 청동기시대의 답사이기도 하다.

 

여기서 분명히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정세변화는 결코 일본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문화 답사일 뿐, 그것이 반드시 우리나라 문화라고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역사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것이 우리 문화는 아니다.

 

영국의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나가 이룬 문화는 미국 문화이지 영국문화가 아니듯, 한반도의 도래인이 건나가 이룩한 문화는 한국문화가 일본문화이다. p12

 

재미있던 부분은, 일본이 처음부터 우리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제는 일본(왜)에 문화를 전하고, 일본은 백제에게 당시에도 놀랄만한 수의 병사를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두 나라는 오랜 기간 우방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통일신라시대 이후 일본와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완전히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우리는 일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많은 기술자(금속공, 목공, 제지공, 섬유직물공), 특히 도공을 납치해서 많은 도자기 문화를 형성하고 우리나라는 그 문화를 박탈당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일본은 그때 경기도와 지방의 도공만을 납치하다시피 데려갔으며, 한양의 도공인은 대부분 어느 정도 남겨져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일본은 데려간 도공을 장인으로 존중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물며 그들의 비석과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고, 사무라이에 준하는 계급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땠는가. 정유재란 이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건너가 도공을 데려오려 했지만 그들은 고향이 막연히 그러운 것을 빼놓고서는 차라리 일본에서 사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래도 고향에서 살겠다고 했던 9,000여명을 데리고 갔지만, 역시 우리나라는 그들을 데려오는 데서 멈췄을 뿐, 그 어떤 지원과 혜택, 기술전수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일본과 조선이 장인과 자국민들을 대하던 자세였다. 물론 일본의 당시 시대분위기인 다도와 맞물려 다완의 값과 희소성 때문이라고 해도, 오랜 기간 그렇게 대접하고 그 가문을 아끼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내가 도자기는 문외한이지만 책에 나오는 사쓰미 백자(p275)는 연한 우윳빗깔에 뭔가 치즈 같으면서도 군침이 도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내가 이럴 정도였는데 당대는 어땠을까.

 

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자칫 일본역사가 바뀔 뻔한 일이었다.

 

다자이후 역사에서 빼놓을 수없는 것의 하나는 바로 몽골의 침입이다. 1274년 1차 침입 때는 몽골군이 하카타항으로 들어와 후쿠오카 일대를 초토화하면서 일본은 풍전등화 위기를 맞았다. 일본군은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몽골군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 행운이 따라주었다.

그때 몽골군은 육지에 진을 치지 않고 모두 배에 돌아가 숙박했는데, 그날 밤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 몽골 전함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침몰해버린 것이다. 일본인은 몽골의 침입을 '원구의 침략'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는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었다. 실제로 여몽연합군의 대다수가 고려병사였고, 배도 고려가 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나라의 강압으로 징집된 것이지 고려의 선택이 아니었다. p225

 

일본에 그대로 남아있는 수성과 대야성도 그 유래를 알면 흥미롭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나라 국사책에서도 등한시 하는 '백촌강 전투'를 알아야 한다. 이 전투는 백제, 신라, 당나라, 왜가 뒤엉켜 일대 결전을 치를 동아시아 사상 미증유의 전쟁이며, 이후 동아시아 체국의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일관계를 따질 때 이 부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사비성(부여)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이때까지도 백제는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부여와 공주 이외에 백제 지역은 백제 신하들이 굳건히 지키면서 수도 회복을 꾀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에 일본 야마토 정권은 백제에 800여척의 군선과 무려 2만 7,000여명의 군사를 지원했다. 그리고 백촌강(지금의 금강 하류)에서 나당연합군과 혈전을 벌였다. 결국 백제와 왜의 참패로 끝났다.

 

전투에 패한 백제 귀족과 백성들이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규슈에서 혹시나 하고 쌓았던 성이 바로 수성과 대야성이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은 일본 대신 북쪽을 택하게 된다. 만약 연합군이 일본으로 침략했다면 또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차,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우리문화를 우리 스스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례가 하나 있다.

 

유홍준 교수가 장관 시절(2007년) 덴마크 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여왕이 하얏트 호텔에서 여왕 주재 파티를 했는데, 테이블에 무려 600명 규모의 파티그릇이 모두 덴마크 로열코펜하켄이었다. 유 교수는 곧 주한 덴마크대사에게 물었다.

 

"이 로열코펜하켄은 다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여왕이 올 때 비행기에 싣고 왔습니다."

"그러면 파티 끝나고 도로 덴마크로 가져갑니까?"

"대개 다시 세트로 포장해서 팔게 됩니다. 이 그릇은 여왕이 파티에서 쓰던 것이라고 하면 스토리가 생겨서 오히려 10% 정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팔리지 않아(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소비문화가 없어서) 유즈드 디시(Used Dish)로 해서 20~30% 할인해서 팔았단다.

 

새로운 문화, 고급문화를 일으키는 것은 공급자의 일이지만, 그것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은 소비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소비자가 만든다.

 

 유홍준 교수가 이 책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우리 문화를 왜 계승, 상품으로 해외에 알리고 홍보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 것은 소중하다고, 우리 것이라고 하면서 정작 지금도 우리 문화를 방치하는 것일까. 막걸리가, 김치가, 된장이 왜 일본 것이 돼야 하는가.

 

혹시 모를 일이다. 이 역시도 일본문화가 될지. 유홍준 교수가 앞서 말했던 일본의 한국문화가 일본문화가 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