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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Storytelling

글렌 굴드, 냉전의 침묵 깬 최초 북이민자이자 피아니스트

 

 

 

냉전의 침묵 깬 최초 북이민자이자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392. 9. 25~1982. 10. 4)

 

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선율이 구 소련과 미국의 냉전의 침묵을 깨는 신호탄이 됐다. 때로는 괴짜이기도, 때로는 천재라고 불리던 글렌 굴드는 천재와 괴짜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글렌. 냉전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감상하면 마음에 파릇파릇한 싹이 트게 된다. 누구나.

 

어느 날 문뜩 클래식을 듣고 싶을 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자. 귀를 쫑긋 세우자. 가만히 들어보면 으스스할 수 있다. 특히 밤에 들을 때는 주의하는 것이 좋다. 놀랄 수 있다. 그 외에는 상관없다.

 

피아노 건반 사이사이에 누군가 내는 비음소리. 방 안의 공기가 낯설 수 있다. 바로 냉전의 침묵을 갠 북이민이자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허밍(humming, 입을 다물고 콧소리로 발성하는 창법)소리다. 늘 꾸부정한 자세로 피아노 건반에 손을 갖다 대는 동시에 피아노 연주에 깊이 빠져버리는 그는 늘 곧잘 알 수 없이 흥얼흥얼거리며 연주했다.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육신의 소리다. 연주에 얼마나 빠져들었길래 허밍소리까지 녹음이 됐을까. 이처럼 글렌 굴드라는 피아니스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천재 피아니스트였지만 괴짜로도 꽤 유명했던 이다.

 

글렌 굴드는 공연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는 것 역시도 원치 않았다. 연주 전에는 반드시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잠시 손가락을 푼 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 피아노 의자도 자신 것을 늘 갖고 다닐 정도로 집착했다. 피아노를 칠 때는 늘 콧소리로 흥얼흥얼거렸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살짝 미친 것 빼놓고서는 상당히 매력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글렌의 단짝, 골든베르트 변주곡

 

1932년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글렌 굴드는 모피상 아버지와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부터 음악을 듣고 자란 그는 글보다 악보를 먼저 읽었고, 어머니는 곧 그가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글렌이 음악가로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헌신했다.

 

사실 글렌 굴드의 천재적인 피아노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유명세를 나타내지 않았다. 모두 그의 실력을 인정하지만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컸다. 냉전으로 미소 양국이 침묵으로 일관하던 1950년대. 미국은 소련과 살얼음판 같은 정치구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미국은 피아노의 변방인 캐나다 출신의 글렌 굴드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12세였던 1944년 키와니스 뮤직 페스티벌 우승과 1945년 이튼 오디토리엄 오르간 연주로 최초 무대를 가진 경력도 필요 없었다. 1947년 캐나다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협주곡 4번 전 악장을 연주,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굳힌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1955년, 한 순간에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제안이 들어온다.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바흐의 골든베르트 변주곡으로 리사이트를 개최하게 된 그는 역시 예상대로 관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다 몇 안 되는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곤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음반으로 내고 싶소.”

 

그가 바로 컬럼비아(CBS) 음반의 녹음담당자인 데이비드 오펜하임(David Oppenheim)이었다. 곧 글렌 굴드는 데이비드와 함께 음반계약을 하게 된다.

 

약속한 6월이 됐다. 글렌 굴드는 역시 괴짜 답게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 자신이 손수 들고 온 접이의자를 폈다. 그러곤 피아노 앞에 갖다 놓았다. 따뜻한 물에 손가락을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타올에 손을 닦기를 수 차례. 녹음이 시작되자 그는 연주에 몰두한 나머지 입을 벌리고 눈을 감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절정에 이르자 그의 등은 새우처럼 굽기도 하며 바짝 펴기도 하길 반복했다. 손을 휘젓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기묘한 연주하는 장면은 곧 스틸사진으로 촬영돼 음반의 표지로 사용됐다. 이 음반은 곧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 하나가 됐고, 당시 발매량도 엄청났다. 굴드의 명성은 바로 이날 녹음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Bach: The Goldberg Variations)>에 기인했다. 그는 이 음반을 계기로 바흐의 음악을 최대한 바흐에 가깝게 재연한 인물로 소개됐으며, 바흐의 음악을 재해석한 1인자로 손꼽히게 됐다.

 

 

 

냉전의 침묵 깼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1950년대에 접어들자 후반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이 이어지자 캐나다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었다. 서방과의 교역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철의 장막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드디어 1957년, 냉전의 침묵을 깨는 첫 연주회가 소련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 주인공은 글렌 굴드. 소련으로서는 당시 미국의 피아니스트를 초청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서방의 상징인 캐나다의 글렌 굴드를 초청했던 것이다. 이후 소련에서 연 연주는 성황리에 마쳤고, 그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순회연주를 하게 됐다. 그 연주가 베를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계속 이어진 연주에 심신이 지쳐갔고, 특히 군중 앞에 나서길 꺼려했던 그의 성격도 한몫했다. 결국 1964년 3월 시카고, 4월 로스엔젤레스 연주회를 끝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그는 캐나다에 은거하면서 음반 프로듀서와 작곡에 몰두했다. 또 청중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연주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했다.

 

다시는 음반 녹음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젊었을 적 자신을 세상에 알려준, 냉전의 침묵을 깰 수 있도록 도와줬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한 번 녹음하게 된다.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가 연주를 또 다시 했던 이유는 자신만이 알 터. 젊은 날의 초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만의 또 다른 음악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그의 인생만큼 갈수록 숙성했던 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관조와 여유, 고양된 예술정신은 냉전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MG새마을금고> 사보 9월호 -역사 속 인물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