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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 Storytelling

책을 읽다가 문뜩

故 홍성원 선생님 저서 중에 <남과 북>(1~6, 문학과지성사>라는 책이 있다. 요즘 이래저래 일을 하며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는 책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약 30여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운명과 인연이 씨실과 날씰로 엮이면서 첨예한 갈등이 유지되고, 그 사이에서 과연 휴머니즘과 동포애, 사랑과 미움, 증오, 우정, 애국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 책 2부를 보면,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두 명의 기자가 있다. 미국 현지인인 킬머와 재미동포인 로이 킴이다. 로이 킴은 아버지의 나라, 자신의 조국인 한국을 보며 한편으론 한국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 내면엔 '내 조국'이라는 애국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한국전쟁의 남한을 대변하는 주인공 격인 '설경민'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로이 킴은 과연 자신의 조국이 미국인지, 한국인지 내면의 갈등을 겪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이 킴과 경민이 만나, 에디 킬머가 작성한 기사에 대해 잠깐 대화가 오가는 장면이 있다.(남과북 제2권 p.82)  로이 킴의 질문에 경민이 대답한다.

 

"한국 민족은 반만년 역사 동안에 '다음에는 누구를 때려부술까?'하는 대신 '이번에는 누가 쳐들어올 것인가를 걱정해온 민족'이라도군?"

"사실이오."

"헌데 당신은 어떤 의도로 킬머에게 그런 얘기를 했소?"

"별다른 의도는 없었소.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오."

"그렇다면 에디는 당신의 말을 다른 의미의 늬앙스로 새롭게 해석해 쓴 것 같군."

"새로운 해석이라니 어떤 의미로 말이오?"

"그 친구는 당신 말을 짧막하게 인용한 뒤 그 뒤에다 이런 말을 덧붙였소. 즉 한국의 국민처럼 싸울 것을 준비하지 않은 게으른 국민은 우방들이 피를 흘리며 방어해줄 의무 역시 없는 것 아닐까?......"

경미은 착잡한 마음으로 차 전방을 아득하게 바라본다.

아마 이런 것을 동양과 서양의 발상법 차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경민이 킬머에게 그 말을 한 것은, 킬머로부터 한국인의 성격이 잔인하고 호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략)

 

이 부분에서 내 시선이 멈췄다. 만약 킬머가 질문한 의도를 다르게 해석해 기사에 반영했다면 이 것은 분명 질문과 답변의 논리비약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단순히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라기 보다, 킬머의 발언에도 일부 수긍이 간다.

 

사람은 자신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처음부터 내성적으로, 내향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주위에 손을 빌려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없음이 아니라 의지 없음을 표출하는 발로가 된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고 평화만을 바라는 것이 과연 윤리적이고 민주적인 것일까. 그런 이라면 나 역시도 도와주기가 싫을지 모른다. 아니, 도와주기 싫다. 그런 소극적이고 의지가 없는 이를 위해, 왜 내 시간과 능력을 쪼개 도와야 하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그것 하나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려 희생된 이들이 이룩해낸 것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기 싫다면 남의 도움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