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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_에리히 프롬 저

 

살면서 한 번즘 느껴봤음직한, 그리고 생각해봤음 직한 명제. 왜 가질 수록, 소유할 수록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고, 마시고, 구입하고, 집에 쌓아두고, 나만을 사랑해주길 원하고 관심 받길 원하는 현대인.

 

반면에 우리 주위 사람들로 시선을 돌려보면, 누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존재를 사랑한다. 꼭 무엇을 하기 위해서 채우기 위해서라는 목적보다, 그리고 수단에 휘둘리지 않고 존재의 당위성과 그만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소유를 갈망하는 삶이냐, 존재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삶이냐 하는 것에 따라 일생 동안 어깨에 메고 있는 짐의 무게가 달라진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 지금 위치에서 지난 날 내가 살아온 삶과 가치, 목적, 그리고 욕심에서 앞으로 좀 더 편안하고 쫓기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질적 함양을 위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실, 난 이런 분들의 책을 손에 접할 때마다, 다소 어렵기는 해도 내가 지녀야 할 삶과 지금의 가치의 진단, 그리고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배나 부모님, 형, 멘토와 같은 느낌이어서 감사하다. 강하게 질책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털어놓고, 나는 그의 글을 통해 느끼고 깨달으면 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크든 작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의 방향만 올바르게 장착하면 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신 프로이트 학파의 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인을 소유와 존재로 이분해서 설명한다. 특히 소유는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로서 주체와 객체를 모두 사물화하고,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과 욕심과 침해, 집착을 발생시켜 작게는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싸움과 크게는 상대 나라의 자원을 약탈하려는 핵전쟁까지로 그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소유에 대한 열정은 계급전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고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 전쟁이 있다고 한다. 탐욕과 평화는 결고 양분하거나 용납되지 않는 것이라 선을 긋는다.

 

또 소유양식에 젖은 학생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즉, 배운 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또는 노트를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배운 것을 지키는 행위에 몰두한다고. 그들에게 새로운 어떤 것을 위해 결코 생산하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고 힐난한다. 하지만 존재양식으로 결부되어  있는 학생은 미리 강의에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고 준비하며 어떤 질문과 문제를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들은 강의 주제에 대해 몰두하며 흥미를 느끼게 된다. 당장 필기보다는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그리고 그 마음 속에는 새로운 질문과 개념, 전망이 일어난다. 그래서 강의를 들은 후 그들은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소유와 존재의 차이는 또 하나의 이야기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우리는 신문 기사나 지인에게 누가 연봉이 얼마라는 얘기를 들으면 '왜 그렇게 많아?'하고 질투하거나 부러워한다. 그것이 다른 면에서는 '평등'이라는 절대적 개념으로 다가서겠지만, 이는 역시 강한 소유지향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엄격한 평등이라는 편견에 의해 부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누군가가 자기보다 더 많이 소유할 경우 그가 갖게 될 부러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즉, 그들을 향해 내가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들을 끌어내리는, 즉 '하향평준화'를 가속화해 다같이 못살 뿐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별을 선언당한다거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보복을 가하는 행위 역시 '소유욕'이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소유하려는 정신적 욕구인 셈인데 이 역시도 상대를 존중하고 존재로서의 의미만 간직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다. 어찌됐든 생존의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개인간의 관계는 그 기본적 요소가 경쟁, 대립, 공포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탐욕 역시 소유지향의 당연한 결과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소유지향의 개인들은 더 많이 차지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기 위해 경쟁과 대립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존재양식에서는 사적 소유는 거의 정서적인 중요성이 없다. 무엇을 즐기기 위해서, 또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가지도 그것을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것을 즐기는 조건으로써 그것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가지라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싸움을 피하도록 해 줄 뿐아니라 가장 심원한 형태의 인간 행복 중 하나, 즉 즐거움을 창조한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소개했는데 잠시 옮겨본다.

 

갈라진 암벽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갈리진 틈에서 뽑아낸다.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내가 너를, 뿌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련만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었네

울타리 밑에

 -일본 시인 바쇼가 지은 하이쿠 중에서-

 

에리히 프롬은 테니슨의 시를 '소유' 관점에서, 바쇼의 하이쿠를 '존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전자의 시는 꽃에 대한 테니슨의 관심의 결과로 생명을 잃지만, 후자의 시에서는 꽃을 뽑으려 하지 않고, 손도 대지 않고, 다만 그것을 가만히 살펴볼 뿐이다.

 

물론 나도 소유에 좀 더 목적을 두고 살아왔다. 이제는 조금씩 눈을 돌려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싶다. 내가 죽고 나면 존재하는지도, 하지 않는지도 모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함께 대화하며 웃고 싶다. 내 눈에 보여지는 수동적인 모습이 오히려 감사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단지 내 책상 앞이냐, 몇 걸음 밖에 나가면 있느냐의 차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