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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Storytelling

과학계 명콤비, 인물 제임스 왓슨(1928. 4. 6~), 프랜시스 크릭(1916~2004)

제임스 왓슨(1928. 4. 6~), 프랜시스 크릭(1916~2004)

DNA 이중나선 발견한 명콤비 ‘왓슨’과 ‘크릭’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20세기 분자생물학의 한 획을 그은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노벨상 공동수상자들이었다. DNA 이중나선 발견을 통해 분자생물학을 한 걸음 더 앞당긴 그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늘 DNA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오죽하면 왓슨은 누이동생과 식사하는 X선의 대가 윌킨스를 보면서도 ‘두 사람이 사귀면 DNA에 대한 X선 연구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을까. 그런 두 사람이 사귀지 않은 건 천만 다행. 역사를 만든 그들의 이야기.

 

 

128줄 논문이 과학계를 사로잡다

 

과학은 하루하루 진화하고 있었지만 과학자들은 늘 이 문제에 대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대체 저 DNA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대체 DNA 구조가 어떻기에 생물형질을 다음세대로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일까?”


미국의 한 화학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어윈 샤가프가 그 DNA 염기를 정량적으로 분석해 시토신과 아데닌, 타민이 각각 1 : 1 : 1 비율로 들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후 모리스 윌킨스가 DNA 같은 생명분자들이야 말로 결정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찾아냈지만 그 근본적인 물음표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네이처》에 놀라울만한 논문 한 편이 게재됐다. 1,000단어에도 못 미치는 128줄의 짧은 논문이었다. <핵산의 분자구조: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라는 제하의 이 논문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모형을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DNA 구조를 밝혀낸 두 청년은 바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두 사람은 이 연구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명콤비를 보여준 ‘왓슨’과 ‘크릭’


‘왓슨’하면 ‘크릭’이, ‘크릭’하면 ‘왓슨’이 거론되는 것은 비단 두 사람이 함께 노벨상을 수상했기 때문은 아니다. 두 사람은 갈수록 빨라지고 메말라가는 현대사회에 동료애와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기 때문이다. 재아무리 명탐정 홈즈라도 왓슨이 있었기에 사건에 접근하며 실마리를 찾고 범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조연이 있어야 주연이 있고, 라이벌이 있어야 자신도 자극을 받아 성장할 수 있는 법이다. 바로 피겨 퀸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처럼.


제임스 왓슨은 이중나선 발견 40주년 행사에서 ‘과학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몇 가지 법칙’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 그중 이런 말을 했다. “의지할 사람을 만들어라. 또 지적인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과학자들과 어울려라.”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더욱 장관이다. 그는 “경쟁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이중나선 구조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진정한 동료와 함께 지낼 수 없다면 과학계를 떠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왓슨과 크릭은 단순한 동료를 떠나 세계 과학을 이끄는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서로 늘 붙어 다니며 대화하고 자극을 주는 사이 큰 연구성과를 내기에 앞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어린 시절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왓슨은 무엇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 했던 터였다. 그래서 늘 책에 파묻혀 지냈다. 다행히 어머니가 시카고 대학 비서였던 터라 당시 대학정책(당시 시카고에서는 재능이 있는 학생은 일찍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을 통해 1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크릭 역시 영국 노샘프턴 근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부모가 사준 백과사전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탐독했다. 그는 이런 고민도 했다고 한다. “내가 어른이 됐을 쯤이면 모든 것이 다 발견되면 어쩌지?”


그런 두 사람이 만나자 시너지가 표출됐다. 두 사람은 쉽게 친해졌다. 늘 물음표를 달고 사는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물며 관심분야도 비슷했다. 냉정함과 성급함까지도. 젊은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오만함까지도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두 사람은 늘 수다가 멈추지 않았다. 여자만 수다를 떤다는 것은 오산이었다. 밥 먹는 시간에도 그들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한 사람이 물으면 한 사람은 대답하고, 두 사람이 물음표를 찍는 날이면 그 해답을 찾아 몇 날 몇 일이든 밥 먹듯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어쩌면 노벨상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왓슨, 복제아기에 대해 경고하다


노벨상 수상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또 다른 연구를 위해 헤어졌다. 왓슨은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로, 크릭은 뉴욕 브루클린 폴리 테크닉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이후 한 번도 같은 연구소에서 연구하지는 못 했지만 학회나 세미나 등지에서 만나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또 서신을 왕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행운을 빌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인연은 시간에 엇갈리고 말았다. 뇌와 인간의식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던 크릭은 2004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먼저 뜨고 말았다. 사인(死因)은 대장암. 왓슨은 오랜 시간 비통해 했다. 왓슨은 2001년 2월 인간유전체 32억 개 염기서열을 해독했다. 다만 그 전에 그는 한 편의 글을 통해 과학계에 경종을 울렸다. 바로 인간복제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는 글에서 ‘모든 과학의 발전이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복제아기를 언젠가 탄생시킬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복제를 세계적으로 불법화해야 한다는 선언 역시 진지한 노력의 성과다. 우리는 당장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어찌됐든 그들의 이러한 연구업적 뒤에는 늘 멈추지 않는 노력과 모험, 즐기는 마음이 있었다. 물론 더 중요한 ‘진정한 동료’가 있었기에 탄력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by 허니문 차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