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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전 5권)_김성한 저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萬斬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라는 말로 매 권마다 시작하는 이 책은 지난 2010년 타계한 故 김성한 선생이 <동아일보>에 5년에 걸쳐 토요일마다 '임진왜란'이라는 제목으로 연재(1984년 1월~1989년 12월)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어 1990년에 초판이 발행됐다. 원래 김성한 선생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한중일 삼국의 시각을 중립적이면서 포괄적으로 담아내고, 동아시아 최초 삼국전쟁이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 '7년 전쟁'이라는 제목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연재 초반 당시 반일정서가 팽배했던 상황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제목을 임진왜란으로 바꿔라"라는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연재 후 단행본은 이와 같이 원래 선생의 구상대로 <7년 전쟁>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 책은 1587년, 선조 20년부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500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을 상대로 전투하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1598년 11월 18일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다. 내용은 비교적 정사와 각종 사료, 족보, 연구자료 등을 기반으로 집필되어 단순히 소설이 아닌 역사 책으로서의 가치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김성한 선생은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선조실록, 명신종실록, 징비록, 신종실록, 진사록, 서애문집, 국역 학봉전집, 이충무공전서, 망우당집, 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 서정일록, 분충서난록, 난중잡록, 춘파당일월록, 일본역사 조선역, 근세일본국민사, 기요마사 조선기 서정일기, 조선학보 양조평양록, 정동실기 등의 자자손손 내려오는 가보와 국보의 역사적 사료와 일본 장수와 종군승들의 기록을 비롯한 기본 사료, 역사인물 후손들의 족보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사실에 근거로 이야기를 펼쳐갔다.

 

가령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로 심유경을 유격장군으로 발탁해 조선에 보낸 석성의 후손인 성주 석씨, 해주 석씨, 조주 석씨까지도 책에서 소개하며,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 장군의 후손(농서 이씨)의 족보를 조사해 정확한 인물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훗날 저자는 "실제 족보와 선조실록 등의 사료와 생몰연대가 일치하는 것을 보고 족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깨달았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단순히 드라마나 시중의 소설보다 한 단계 더 뛰어 넘는 배움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대권을 위해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파로 나뉘어 결국 1600년 9월, 세키가하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렇게 마지막까지 히데요시에 딸 달라붙어 고시니 유키나가와 반복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 진영이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결국엔 임진왜란과 관여된 인물은 대부분 비침한 인생의 말로는 겪는다.

 

천주교 신자로서 전쟁을 막고자 마지막까지 애쓰며 히데요시의 눈밖에 나기도 했던 고시니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후 산속을 숨어다니자 산승의 밀로고 체포되어 이시다 미쓰나리와 안고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당한다. 그러곤 혈통이 끊겼다.

 

가토 기요마사는 비록 이에야스에 붙어 유키나가의 영토를 침공해 자기 세력권으로 넓히고 유키나가의 거성이던 우토 성을 헐어 자신의 성내에 옮겨짓기도 했다. 그러나 1611년 6월 지병이었던 매독으로 사망했다. 시체는 온몸이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었다고 한다. 얼마 후 아들 다다히로가 뒤를 잇지만 곧 봉토를 몰수당하고 그는 귀양길에 오른다. 마침내 기요마사의 손자 미쓰마사를 마지막으로 역시 혈통이 끊긴다.

 

임진년 총대장으로 나섰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후 여러 해 숨어 살다가 도쿄 남방 1,200리 태평양상의 하치조지마로 귀양갔다. 그는 그곳에서 손수 짠 삿자리로 잡곡을 바꿔먹으며 근근히 목숨을 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평생 소원이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쌀밥을 먹어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였다고.

 

사실 이 전쟁은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세력을 손에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만이 불러내고, 체면 때문에 어처구니 없이 저지른 흉악 범죄였다. 책에서도 자신의 체면을 위해 조선 왕, 혹은 왕자가 직접 찾아와 사과라도 하길 바라나 그럴 수는 없는 일. 결국 그는 제2차 조선 침공, 즉 정유재란을 일으키게 된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진 이유는 수군의 역할로 식량조달이 어렵고 후방지원이 곤란하게 된 것도 큰 이유다. 또 하나 꼽자면 일본은 각 마을과 성을 점령할 때마다 주민을 학살하고 내쫒은 결과가 가져온 대가가 컸다. 논과 밭을 거둘 인력이 전무해 결국 식량이 모자랐고, 각 마을과 성마다 일정한 수(300~400명)의 주둔군을 두다보니 북으로 올라갈 수록 병사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점, 조총에는 화약과 탄알이 필요한데 이를 공급할 해상지휘권을 이순신 장군에게 빼앗긴 것이 컸다. 복장 역시도 여름 군복으로 입고와 겨울을 맞을 준비를 못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이 책은 또 사명대사(송운)과 홍의장군 곽재우는 물론 다른 이름 모를 훌륭한 장수와 전쟁에 대해서도 지면을 최대한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임진왜란의 다른 인물들의 역할과 상황 등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익했다. 또 현재의 일본국기가 고니시 유키니가의 깃발에서 유래됐다는 점과, 종군승처럼 전쟁에 일본이 스님을 대동했던 이유는 망자의 위로와 의술, 편지 왕래(문자) 등의 이유였던 것도 이번에 알게 됐다.

 

읽는 동안 분통을 터트렸던 것은 그리도 그때와 현재가 이리도 같을지. 당시 조선과 일본에 명이 개입해 조선을 빼고 명이 직접 일본과 할지 등을 논하며 휴전을 제의한 사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53년 한국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한국을 빼고 북한과 직접 휴전논의를 진행한 점, 그때나 지금이나 무능한 통치자는 여전하다는 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는 가족이 몰살당하고 백의종군의 길을 간다면 그와 반대에 선 비루한 인간들은 여전히 잘먹고 잘 살고 있다는 점은, 역시 역사야 말로 미래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그리고 탁상공론처런 전선에 가보지도 못한 한양의 조정 대신과 임금은 무조건 명령만 내린다. 그러다 원균이 고성에서 일본군의 기습과 뭍에서의 잠복으로 거의 전멸을 당한 후 선조는 이리 말한다. "한산도를 굳게 지키고 적에게 위협을 가하면 되는 것인데 굳이 내몰아 가지고 이런 참패를 당하게 했구만" 책 내내 이런 식이다. 앞뒤 재지 않고 저질러 놓고 마지못해 후회한다. 임진왜란이 끝나도 정유재란 직전까지 정신을 못차리는 조선 조정.  그에 반해 자신들의 실리를 위해 군사부터 군량, 수군, 군함 제작, 전초기지 건설까지 차곡차곡 준비하는 사뭇 조선과 상반된 일본. 21세기에도 바뀐 것이 없다. 조선 침략 전 히데요시는 조선을 빗대 "자다가도 시, 놀다가도 시, 오로지 시밖에 모르는 나라'라며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법도와 법치만 중시할 뿐, 현장과 현실, 국민의 현 상황을 동떨어지게 판단하는 조선 조정. 여전하다.

 

임진왜란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임진왜란은 말 그대로 '임진년에 왜인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일본을 국가로 치부하지 않고 미개인으로 바라보며 한번의 난리로 치부하려는 역사의식을 반영한 명칭이다. 그러나 7년 전쟁은 이 전쟁을 국가대 국가로 바라보는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전쟁을 수식하는 명칭이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문록경장의 역'이라고 한단다. '문록경장 연간(1592~1614)의 전쟁' 정도의 의미를 지녀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는 이 용어에도 침략의 본질을 감추려는 꼼수가 보인다.

 

그런가하면 중국은 이 전쟁을 '항왜원조'라고 한다. '일본에 맞서 중국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대국주의 관점을 오롯이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리했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한 권의 흥미진진했던 그 어떤 교과서보다 훌륭한 역사 교과서였다.

 

-조총이 아무리 위력이 있다 하더라도 화약과 탄약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공부도 화약과 탄약과 같다. 사람이 평소에 공부하지 않음은 화약과 탄약 없이 조총을 들고 다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의 눈에는 혼돈으로 보일 뿐, 세상만사 갈 길을 찾아가는 법이다.

 

-어린 애는 1천명 모여도 어린애, 어른은 한 명이 모여도 어른

 

-활을 당기는 사부(射夫)도 판국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명중률이 다르고, 노만 젓는 격군(格軍)도 알고 모르는 데 따라 팔에 주는 힘이 달랐다.

 

-개인 간의 주먹다짐이나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싸움의 이치는 다를 것이 없었다. 상대방의 급소를 쳐서 더 이상 꼼짝 못하게 하면 이기는 것이고, 이쪽에서 급소를 맞으면 지게 마련이었다.

 

-군대는 크고 작고 간에 그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장수 한 사람이다. 그에게 싸울 의사가 없거나 의사는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그 군대는 아무리 정예라도 산송장의 집단이나 다를 것이 없다.

 

-큰일을 도모하자면 화가 치밀어도 지그시 누르고 만사를 저 가을 하늘같이 맑은 심정으로 보고 들어야 한다.

 

-홍수를 염려해서 농사를 안 짓고, 물에 빠질까 두려워서 헤엄을 안 치는 격인데 바닥을 면하기는 글렀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옳은 일과 그른 일,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분하라.

 

-세상에는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는 갖가지 색이 있다. 마찬가지로 전쟁에도 승과 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적의 실정과 우리의 형편을 감안해 그 중간의 적당한 지점에서 결말을 지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