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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모음(집필 및 기고 관련)/시사_사회_삶

슬픈 역사가 지어준 이름, 인절미 그리고 도루묵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 인절미와 도루묵. 지금도 시장 한켠에 자리잡은 떡집 앞에 놓은 고소한 인절미 하나를 손에 집어 입 안에 넣으면 그리 꿀맛일 수 없다. 그런가하면 도루묵은 어떤가. 늦가을 강릉의 한 포구에서 잡아올린 도루묵은 알이 꽉 차있어 숯불에 구워먹으면 그렇게 맛깔날 수 없다. 그런데, 그 두 음식의 이름은 서글픈 우리 조선의 역사를 안고 있다.

 

먼저, 인절미를 보자. 인절미는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이를 절구에 찧어 조그맣고 네모진 각으로 자른 후 고소한 고물을 묻혀 만든 떡이다.

 

인조 2년(갑자년 1624)에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였던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은 당시 북쪽 국경수비대와 항왜군(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했다. 이괄 역시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기에 어떻게 한양으로 진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진격하는 동안에 관군의 저항다운 저항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 했다.

 

그런데 얼마 전 KBS iTV '역사저널 그날'을 보니, 이괄이 평안도로 발령을 받은 후 국경 수비대에 훈련을 너무 시키던 것이 조정의 반란 오해를 불러오게 되고, 그의 외아들을 심문하게 이르러 한양으로 진격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목적성을 띤 '난'이 아니라, '갑작스런 일에 대응하게 되는 '변'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즉, <이괄의 변>이 되는 것이다. 하긴, 반정을 통해 왕이 되고, 반정으로 권력을 잡았으니 그 만큼 서로 불안했을 터다.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것처럼.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짐을 싸서 피난 계획을 세운다. 즉, 도성을 비우는 것이다. 백성들은 노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도성을 버린 후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또 한 번 허탈함에 빠졌다. 인조는 피난 도중 우성면 복천리 부근 임씨네 집에 임시로 기거하게 된다. 이때 임씨네 집에서 진상한 음식을 보다 고물이 묻은 떡 하나를 손에 집어 먹는 인조.

 

"맛이 있구나. 이 떡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건 저도 잘 모르옵니다."

"분명 떡 이름이 있을 텐데 아무도 모르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러면 이 떡은 어디서 가지고 왔는가?"

"임씨네 집에서 가져왔습니다."

"오호~ 절미(絶味)로다. 절미야."

 

그래서, 임씨네가 만든 절미라고 해서 '임절미'가 되고, 이후 임의 'ㅁ' 대신 'ㄴ'이 더해져 오늘 날 '인절미'가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도루묵은 어떤가. 선조 14년 임진왜란이 반발하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간다. 피난 도중 한 어귀에서 가난한 어부를 만나게 되고, 그 어부가 이름 모를 허름하고 작은 생선을 선조에게 진상한다.

 

"생선 맛이 아주 기가 막히구나. 이 생선의 이름은 무엇인고?"

"그냥 '묵'이라고 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생선을 '은어'라 부르도록 하라"

 

이리하여 은어를 맛있게 먹은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성에 돌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그때 먹었던 은어맛이 떠올라 궁중 요리사에게 은어를 밥상 위에 올려놓으라 명했다. 그 은어를 한점 먹어보던 선조가 이렇게 말했다.

 

"이 생선이 은어가 맛는가?"

"그러하옵니다. 은어 맞사옵니다."

"맛이 그때같지 않구나. 도로 묵이라 하여라"

 

그리하여 '은어'는 도로 '묵'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보면 인절미나 도루묵이나 모두 암울했던 조선시대 역사의 산실이 아닐까. 백성의 어버이가 쉽게 도성을 비우고 피난을 가며, 백성을 살피지 못하고 신하들 권력다툼에 희생양이 됐던 그 시대 왕들. 이 음식 하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의미는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