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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ng Man

초한지 전 3권_정공채 저

 

책은 진작에 읽었는데, 당장 집중해서 책 한 권을 펴내야 하는 일 때문에 평이 늦었다. 이제는 길든 짧든, 평을 쓰지 않으면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식사 후 양치를 하지 않은 느낌 때문에 왠만하면 쓰는 편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초한지(전 3권). 시인으로 잘 알려진 故 정공채 선생이 1984년에 펴냈다. 문화방송(현 MBC) PD 출신에 부산일보, 민족일보 기자를 지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건, 오히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나 할까. 정비석 초한지(전 5권)는 1권 읽다 멈췄다. 너무 글이 산으로 갈 뿐더러 고증이나 묘사가 너무 부족하고, 크게 상관 없는 대목이 너무 길었다. 현종의 패왕별희(전 5권)는 반대로 묘사가 좋으나 항우가 우희를 만나는 장면과 애정씬 등에 너무 많은 수식어와 묘사가 많아 역시 1권에서 포기. 이문열은 뭣모를 고딩 때는 삼국지와 수호지를 뗐는데, 그가 명성황후(민비)의 우상화에 앞장섰다는 걸 알고서는 그의 책은 다시는 읽지 않고 있다. 그러다 검색 중에 정공채 선생이 쓴 <천하통일 초한지>를 알게 됐는데, 온라인으로 헌책방에서 구입, 후다닥 읽어 내려갔다.

 

 

옛책은 이런 면이 좋다. 종이 냄새도 좋지만 그 투박함과 소탈함, 그리고 조판 인쇄에서 느껴지는 한자 한자의 소중함이 다가온다. 그래서 이 책 만큼은 한자 한자 놓치지 않고 읽었다. 때로는 당시 인쇄 특성상 글씨가 90도 돌아간 것도 두세 글자 정도 찾았는데, 속으로 피식 웃곤 했다. 촌스러워도 결코 부끄럽거나 유치하지 않은 표지와 내지 디자인이다.

 

 

책을 한장 넘기면 만리장성이 나온다. 당시 3권 모두 초한지와 관련있는 이미지와 캡션(사진 설명)이 적혀 있어,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큰 줄거리와 그에 따른 세세한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없고, 사료를 중심으로 고증한 것이 무리가 없다. 여타 책처럼 항우와 우희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는 것도 없다. 대신 유방과 여치 얘기도 거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움. 여치가 한신을 죽이는 내용을 살짝 기대했는데. 그래도 이 부분은 뭐 내 욕심이니. 그것보다 큰 줄기가 더 중요하니까. 만약 내가 개정판을 낸다면 그 부분을 3권 끝에 좀 넣지 않았을까?(아닌가?)

 

 

 

위 왼쪽은 아방궁터(아방궁은 당시 고장 이름이었다고 함, 2세 황제인 호해가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그 후에 모두 말아먹었지만).  그 아래는 진시황릉.

 

 

책에서 보면, 장량이 한나라에서 떠나면서 중앙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인 잔도에 불을 질러 길을 막아놨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항우로 하여금 유방에게 관심을 못 갖게 하고(길이 없으므로 갇혀 있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한나라 병사들도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한나라에 충실하도록 만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장량은 책사로서의 임무와 군사, 세작 등의 역할도 병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문으로 친절하게(?) 적혀 있는 당시 지도. 한자공부 열심히 해야 할듯 하다. 곧 영어보다 한자의 시대가 올 것이다. 해외 글로벌 기업인 구글 등이 만들어 내는 동시번역기만 해도 영어와 일본어 등 중심이 되도, 중국어는 없더라. 아이들 한자 공부 시켜야 한다고 봄.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은 한자문화권이기에 이들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보다 한자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 근데 웬 곁가지?

 

 

본문처럼 진시황 이야기부터 흘러간다. 진시황 말기부터 호해가 내시 조고와 함께 진시황의 유서를 위조하고 황위를 찬탈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거의 1권에 소개된다. 그래도 책의 글씨와 행간, 자간을 보면 알겠지만 거의 요즘으로 보면 7~8권 분량의 텍스트이고, 가로쓰기를 했다면 10권까지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양이다. 전권 32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평소에는 책 하나만 읽게 되는데, 이번에는 팟캐스트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장웅/허진모 진행)>와 중드 초한지(2013년 판, 80부작), 고우영의 초한지 등을 동시에 듣고 보고 읽었다. 그 와중에 마감할 거 다 하면서. 버스나 지하철 이동할 때는 팟캐스트를 듣고, 지하철 안이나 취침 전에는 책을, 중간 중간에는 중드와 만화를 봤다. 그러니 대략적인 줄거리와 어느 부분에서 소설이고 정사인지 알겠더라. 중요한 건, 소설은 소설로 이해하고, 큰 맥락은 유지하되, 각기 인물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역사는 누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적 진실을 바탕으로 개개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래서 국정교과서는 위험한 것 아닌가. 역사의 해석은 다양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고, 나도 그렇게 본다.

 

내용을 잠시 간추려 보면 항우는 참으로 비운의 시대를 살다간 안타까운 인물이다. 적어도 모사인 범증 말만 잘 들었어도 그는 충분히 유방을 제치고 천하를 통일한 주인공이 됐을 터. 그리고 역사를 바꾸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잔인아고 무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물이지만 자기 여자를 아끼고, 작은 정 하나에도 눈물 흘리는 걸 볼 때 사내대장부라기보다, 아이같은 감성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또 항우는 논공행상을 잘 못 했다. 그것이 배반과 배신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진평을 탈락시키고, 한신을 끝까지 말단 직위에 머물게 했다. 추후에 한신은 자작시를 통해 자신을 '처마끝 제비 신세'라고 읊조리기도 했다. 한이 되긴 됐나보다. 진평은 유방에게 와서 훗날 초나라 항우의 배급로를 모조리 끊어 죽음의 구석에 몰아넣는 신의 한 수를 두고 만다.

 

유방도 한신을 끝까지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장량과 소하가 끝까지 목숨걸고 추천해 된 것이다. 그건 항우나 유방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항우를 낮춰 볼 것도, 그렇다고 유방을 높이 볼 것도 없다.

 

반면 유방은 오히려 겁이 많고, 눈치를 보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잘 모르기 때문에) 굳이 우기지 않는 성격, 그러면서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참고 하는 스타일이다. 천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잔인하고 잔혹한 항우냐, 자신의 정략을 유방을 통해 실현할 것인가는 답이 뻔하지 않나. 나라도 항우보다 유방으로 가지 않았을까.

 

항우는 적어도 유방을 없앨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첫 번째는 초나라 황제가 끼어들기 전에 본인이 진나라 함곡관으로의 진격로를 빠른 길로 갔어야 했을 터. 그랬다면 그가 모사 역이기도 얻을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홍문지연'. 범증이 유방을 그렇게 죽이라고 했지만 그는 유방을 그대로 살려서 형의 마음으로 보내준다.(실은 유방이 항우보다 10세 이상 많지만 유방이 알아서 기었던 셈이다. 그래서 항우를 형으로 모셨다고 함)

 

어쨌든 유방은 항우를 치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리고 토사구팽이라고 했던가. 그러고 나자 한신을 역적으로 몰았고 여치의 손에 허무하게 죽는다.(정사에서는 진회와 함께 반란을 꾀한 책임이라고 하나, 팟캐스트 허진모 석사는 한신은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쭉 지켜본 나도 한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칭기즈칸을 읽는데 마침 초한지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주적을 모두 말살하고 나면 나중에 그 칼이 내게 돌아 온다는 것, 때문에 먹을 것을 모두 싹 잡아다 주인에게 바치는 어리석음을 내비치지 말 것, 그리고 잔인한 것은 결코 이롭지 못 하다는 것이다. 위세등등했던 자무카가 칭기즈칸에 한순간 역전 당하는 그 첫 번째 순간이 바로 그 잔혹함이었다. 칭기즈칸은 이를 이용하기 위해 상인을 호의로 대우하며 이 부분을 소문내기에 이르렀고, 이를 들은 다른 부족이 자무카가 아닌 칭기즈칸에 붙은 것을 볼 때, 처음 초한지 부분도 고을 사람들이 항우보다 유방에 몰려 온 것과도 같다. 소문은 무섭다. 그리고 잔혹하면 상대는 항복하기 보다 목숨걸고 대항하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쪽 피해도 클 수밖에 없다.

 

책 3권이었지만 읽는 내낸 참으로 행복했다. 이런 책을 또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마음으로 난 지금 칭기즈칸을 읽고 있다. 이하는 내가 문맥 중 꼭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 한신 과하지욕 : 한신이 유랑할 때 동네 불량배가 시비를 걸었다. 그는 비참함을 참고 불량배 가랑이 사이를 지나간다. 지금 잠깐의 치욕을 참고 나중에 큰 대의를 도모한다는 뜻. 훗날 한신은 이 불량배를 찾아 큰 보상을 내렸다고 한다.

 

* 쾌도난마(快刀亂麻) : 어지럽게 뒤얽힌 사물을 강력한 힘으로 명쾌하게 처리함

* 춘추전국시대 무렵 진나라 소진이 6국을 돌며 맺었던 합종책을, 그의 사후에 반대로 장의가 6국을 돌며 연형책으로 바꿔놨다. 그런 장의가 진으로 돌아오자 혜왕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올랐는데 그를 반긴 것은 환영이 아닌 모함이었다. 그가 오래 자리를 비운 사이 그를 질투하던 이들이 책략을 꾸민 것. 장의는 이로써 두 번의 모함을 당했다. 자리를 오래 비워서도 안 되고, 혼자 재주를 다 부려도 안 됨.

 

* 조나라 인상여의 지혜가 놀랍다. 대놓고 빼앗으려는 술책을 오히려 모른척 대놓고 얘기함으로써 '화씨의 구슬' 욕심을 지혜롭게 대처.

* 기화가거 [奇貨可居] : 진기한 물건은 잘 간직하여 나중에 이익을 남기고 판다는 뜻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

 

* 여씨춘추 : 십이기, 팔람, 육론 등 20만여자로 구성. 여씨 빈객들이 집필. "여씨춘추에서 단 한 글자만이라도 고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천금을 내리리라" -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함.

* 진나라 시절 노애 : 차츰 경거망동, 욕심 등이 자신을 망침

 

* 초한지를 보면 진나라 왕전이 출병하기 전에 아들에게 "내가 전쟁에서 이기고 오면 대궐 같은 집과 돈을 달라"고 거듭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 누가 이 이유를 묻자 한신은 "황제는 의심이 많아 전쟁 중간에 또 나를 부를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지게 된다. 그래서 내가 다른 것에 마음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감동이다.

 

* 삼십육계에서도 패전계가 있다. 패전을 잘 하는 것도, 잘 망하는 것도 중요하다.

* 형가의칼 : 위나라 태자가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명함. 형가가 진무양과 함께 번어기 목(진나라 장수였으나 사연이 있어 위나라로 망명)과 지도를 들고 알현. 마침 진무양(망나니와 살인 경험이었으나 다 필요 없음)이가 떨어뜨려 실수. 진시황이 지도 먼저 보자고 함. 번어기 목부터 봐야 비수로 암살하는데. 형가의 암살 실패. 중요한 순간에 너무 긴장 말자. 편하게.

 

* 자왈~ 은 공자만 사용. 최고의 스승이 공자
* 진시황은 장수들의 단물을 쏙 빼먹었다. 그걸 미리 알고 행한 왕전도 대단.
* 천황 지황 태황 중 태황의 황과 상고의 제를 붙여 황제로 칭함. 짐이라 부르며, 황제의 시조라 시황제라 한다. 고로 진시황.
* 노생이라는 유생이 진시황의 명령으로 서시를 찾기위해 나서다 기인을 만나 <천록비결>이란 책을 받아 올린다. 그책에 망진자호, 즉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는 호라는 글자에 호족을 멸하며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알고보니 둘째 황자인 호해였다. 멀리 있는 호족은 보이고 가까이 있던 아들 호는 보지 못한 유둔함.
* 지피지기 백전불태. 위태롭지 않다.
* 진시황 : 문자, 화폐, 도량형 통일
* 지록위마 : 환관 조고가 내편을 가려낼 때 쓴 말
* 홍문지회 이후 항우가 서초패왕이 됌
* 전당합각

* 천리마도 백락을 만나기 전까지는 잡마에 불과했다.

 

* 궁구물추(궁구막추) 너무 모질게 상대를 핍박하면 되려 당한다는 뜻

* 인재가 있어도 볼 줄 모르고, 인재를 봐도 쓸 줄 모르고, 인재를 써도 중용할 줄 모르면 무엇을 이루랴?

* 목장지하패 인장지하승 : 큰 나무 아래는 그늘로 인해 더 자랄 수 없지만, 큰 사람 아래이 있는 사람은 그 덕으로 인해 더 크게 자란다.
* 한신의 배수진은 조나라 도읍 정형성을 공략할 때 처음 등장. 근흡과 번쾌. 죽은 땅에 든 뒤라야 살게 되고, 망하게 된 처지에 놓여야 일어난다. 당시 한군은 사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에 지침. 그러나 조군은 10만 정예.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부득히 사용.


* 옛날 백리해는 우에서는 망했고 진나라에서는 패업 일으킴. 우가 우나라에서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신임해 쓰고 안 쓴 것과, 그의 말을 듣고 안 듣는 것과의 차이.
* 역이기 : 한신과 공을 다투다 어처구니없게 먼저 간 노인. 내가 세치혀로 먼저 가서 제왕 전광을 귀향시키면 그 공이 한신보다 클 것이라 생각.

 

* 한신이 제왕 인수를 요청하자 분개하는 유방(3권 246). 잘 달래서 제왕 봉함. 이를 안 항우가 무섭을 한신에게 귀순차 사신으로 보냄. 무섭 왈 "지금 통일 되면 한신은 죽을 것. 급할 때와 편할 때 다르다. 날랜 토끼 죽으면 사냥개 삶고, 새가 없으면 활도 필요 없고, 적국 망하면 모사도 필요 없음. 만일 초나라 망하면 한신은 자리를 잃을 것. 초패왕과 한왕은 한신이 저울질하기에 달렸다"고 꼬심
* 출세의 여부는 골격에 있고, 기쁘거나 슬픈 날의 앞날은 얼굴모양과 표정에 있다.

* 하늘이 내림에도 받지 않으면 허물을 받게 되고, 때가 와도 행하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
* 용맹이 주인을 누르게 되면 그 놈이 위태롭고, 공이 천하를 덮는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한다.
* 남의 심부름만 하는 사람은 만승(임금)의 권세를 잃게 되고, 조그마한 녹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경상(임금을 돕는 대신)의 지위를 얻을 수 없다
* 맹호의 망설임은 벌의 쏘는 것보다 못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