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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전 8권_이재운 저

 

 

* 이 서평은 유난히 길다. 오롯이 칭기즈칸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또 훗날 내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인생의 길목에서 찾아내기 위한 기록으로 남겨둔다.

 

칭기즈칸. 알지만 모르는 인물. 그만큼 주위에서 주변에서 매체에서 자주 거론되는 몽골의 역사적 인물이긴 하지만, 그랬기에 제대로 짚어보지 않아도 큰 인물 정도로 간주되어 왔던 인물. 하지만 기회가 되어 칭기즈칸 책을 펼치게 됐다. 6월 15일 전에 책을 펼쳤으니, 근 3주 동안 틈틈히 읽어 내려간듯 하다.

 

 

 책은 소설적 요소라는 양념으로 8권을 이어가고 있지만, 기본적인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나 사실 관계, 그리고 당시 고려를 비롯한 중원의 상황은 팩트를 기반으로 한다. 때문에 훗날 활을 잘 쏘는 몽골족이자 칭기즈칸의 오른팔인 제베와 초희가 몽골노인인 '나친'과 함께 고려 무신 정권에 항거하다 북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지만, 나머지 전개 과정은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한다. 이에 크게 소설이니까 허구적 오소를 많이 가미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은 갖지 않고 읽어내려가도 크게 문제가 없을 듯하다.

 

초고를 써놓고도 5년이나 긴 세월을 그냥 보내며 훗날 '칭기즈칸과 나의 몸 속에는 결국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가속도를 붙여 탈고했다는 이재운 작가는 한때 <소설 토정비결>로 베스트셀러를 써내려간 작가이기도 하다.

 

칭기즈칸 초상화

 

팟캐스트 소속사(소설 속 역사 이야기)가 최근 <몽골비사>라는 책을 토대로 칭기즈칸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도 재미를 안겨준다. 이 팟캐스트와 영화 몽골, 중국 드라마 <칭기즈칸의 후에>(50부작)도 틈틈이 함께 보면 여러 캐릭터가 한 번에 윤곽을 드러내면서 사실적 이야기와 허구, 역사적 토대, 광활한 영토와 생활환경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각주와 용어 설명, 가계도, 당시 칭기즈칸의 진격로 등이 잘 배치되어 있어 용이하다.

 

칭기즈칸은 역사서에는 1155년 생으로 나온다. 손자 쿠빌라이(칭기즈칸의 4남 톨루이의 차남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우면서 칭기즈칸은 태조가 된다. 책에는 칭기즈칸이 4권까지는 크게 존재감이 없다. 자무카와의 우정과 쟁패, 그리고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톨루이칸과 삼각구도(라고 하지만 오히려 칭키즈칸, 당시 테무친이 고군분투하며 자무카의 병력을 끌어들이고, 보르추와 젤메, 제베, 칠라이 등과 만나는 여정이 길게 그려진다)를 형성하며 이야기가 흐른다.

 

 

책에는 한 권에 담았던 서사적인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연도별 정리와 지도를 그렸다.

 

칭기즈칸은 오히려 보르지킨족(푸른 이리)의 독주를 위해 타타르족과 자다란씨족, 메르키트족, 케레이트족, 차이추트족, 수르도주씨족 등을 굴복시키며 남쪽과 유럽 등지로 뻗어가며 정복을 위한 밑거름을 만든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오히려 세계의 절반이나 되는 정복은 그의 이후 대칸이었던 2대 오고타이칸, 3대 구유크칸, 4대 몽케칸, 5대 쿠빌라이칸이 이어가며 대정벌의 막을 내렸다.

 

칭기즈칸에는 두 명의 비중있는 인물이 그려진다. 한 명은 자무카, 또 다른 한 명은 제베. 둘 다 매력있는 인물이다. 자무카는 칭기즈칸의 어렸을 적 '안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칭기즈칸과 꿈과 야망이 겹치는 것을 알고는 운명적으로 칭기즈칸을 향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칭기즈칸에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면서 "광활한 정복을 꼭 이루길 바란다"며 숨을 거둔다. 칭기즈칸도 몇 번이나 그와 함께 하고 싶었으나 자무카가 완강히 거절하는 장면도 가슴 찡하다.

 

실제로 당시 테무친의 병력 대부분은 자무카의 자다란씨족 사람들이었다. 자무카는 귀족들을 위한 정책, 테무친은 평미을 위한 정책을 썼고, 이것이 자다란씨족을 끌어들이는 데 주효했다. 자무카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어쩔 수 없었을 터.

 

소설 속에서 애인이자 승려 효심의 딸인 초희와 함께 그려지는 김사영, 훗날 제베의 역할도 비중있게 그려진다. 처음엔 제베가 허구인물인줄 알았으나 검색하니 실제로 활을 잘 쏘던 몽골족으로 묘사되어 작가가 이 부분을 흥미롭게 각색하기 위해 고려인을 분장시켰구나 하고 여겼다. 충분히 소설 전개에서 다룰 수 있는 묘사다. 무엇보다 제베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백발이 듬성듬성할 때 금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초희와 그의 딸 알탄 하다스, 완안고려와 만나는 장면은 정말 찡하다. 완안고려는 검색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제베는 한나라의 한신, 진나라의 왕전과 닮았다. 실력이 너무 출중하며 대칸(왕)의 의심을 몸소 받는다는 사실이다. 칭기즈칸도, 4대 몽케칸도 제베가 혹시나 정벌갔다가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것 아닐까하는 우려를 내내 나타낸다. 제베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으나 칭기즈칸과의 의리를 지키며 끝나 몽골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 몽골(2007)에서의 칭기즈칸

 

영화 몽골(2007)에서의 자무카

 

책을 보면 삼국지나 초한전이나 가짜 밀서로 내부 첩자를 의심하게 만들어 반복하게 하는 건 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호라즘을 칠 때 술탄에게 어머니 타르칸 태후의 밀서를 위조로 서로 위심하게 함으로써 안으로부터 무너저내리게 한 후 정복한 건 절묘했다. 그건 칭기즈칸의 주된 수법이기도 하다. 적은 군사(약 10만)이기 때문은 늘 정면 공격보다 공포, 첩보, 회유, 기습, 유인, 심리전 등을 먼저 써서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법을 내세운 후 최후에 싸움을 택했다.

 

또한 칭기즈칸과 제베는 전쟁 전에 반드시 백성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했다. 그 효과는 컸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항복하는 자도 모두 등용하며 고른 정책을 펴나갔다. 이 방법은 훗날 금나라와 호라즘을 치는 데 큰 효과를 나타냈다.

 

한편, 칭기즈칸과 똑같은 운명의 궤를 뒤집어 쓴 주치의 삶도 충분히 동정이 간다. 평생 메르키트족으로 형제였던 벡테르와의 악연을 주치도 동생 차가타이와의 갈등을 내내 이어간다. 그러다 대칸의 자리를 오히려 3남인 오고타이가 차지하면서 그는 유럽 정벌 후 몽골 고원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눌러 앉으며 <킵차크칸국>을 세운다. 칭기즈칸도 이 점을 잘 알고, 또 제일 아쉬워하지만 끝내 숨을 거둘 때까지 주치를 그리워한다.

 

칭기즈칸의 이 말도 기억 남는다. 보르추와 젤메에게 "그대가 항상 내 맘에 있게 하라"고 나직이 말한 점. 또한 칭기즈칸이 죽던 1227년 돼지 해. 그는 마침내 서하의 항복을 받았지만 끝내 국왕 이현과 재상 아샤 감부를 잡아온다. 그때 칭기즈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한 번 배신한 놈은 믿지 않는다. 항복도 작전일 뿐. 나는 이겼고, 너흰 졌다 그러므로 내 말은 옳고, 네 말을 틀렸다."

 

넓은 땅과 유목민만의 특성 상 주치와 칭기즈칸의 무덤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처럼 칭기즈칸이 부르칸산에 매장됐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 주치의 경우처럼 몽골 땅이 아닌 엉뚱한 곳에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 작가는 칭기즈칸의 근원이 된 바이칼호 주변이나 그가 태어난 오논 강변에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일제가 보물에 눈이 어두워 칭기즈칸의 무던을 뒤지고 다녔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몽골(2007)에서의 한 장면

 

책에는 약 8차에 걸친 여몽전쟁이 나온다. 책에서는 황금씨족이 정벌을 떠난 자리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는 걸 정복자 입장에서 봤을 때 멋있게만 느껴졌으나, 2대 오고타이가 대칸이 된 후(6권) 고려 정벌에 나서는데, 대박 전쟁이더라라는 생각이 스쳤다. 말이 백성들의 모든 씨를 말렸다는 한 마디지, 실제 그 상황이 닥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입장이 바뀌니 사실 욕도 조금 나왔다.  2차 침입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가하면 6차 침입 때,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800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했다.

 

오고타이칸이 1234년 금나라를 멸하고, 유럽을 정벌하기 직전, 오고타이칸은 재상 야율초재의 진언에 따라 그간 관행을 깨고 직접 본진을 지킨다. 이는 광활한 대국을 지배하고 세금 등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행정 수도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제국의 기틀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법과 제도, 행정을 구축했다. 하지만 오고타이칸은 늘 칭기즈칸의 후광이 따라다녀 괴로웠다. 늘 술과 향락에 찌들다 마침내 짧은 생을 마친다.

 

재상 야율초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행정도시 건설과 동시에 <무술선시>라는 첫 과거를 시행했다. 무려 4,300명. 거의 현대 공무원급 채용이다. 그중 1/4가 전쟁 포로 출신 노예이며 각국 포로들에게도 똑같은 응시권을 부여했다. 그후 내부에서 반발이 이어가자 제2회는 그보다 80년 후에 시행되기도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칭기즈칸 시절보다 그의 자손들(6~8권) 이야기가 더 스펙터클하다는 점이다. 그의 아들과 자손들이 대칸 자리를 두고, 그리고 정통성과 유목민의 뿌리를 두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즉, 형제의 난과 정복 등 두 가지 스토리가 함께 그려진다. 쿠릴타이를 장자만이 열 수 있음에도 섭정을 하는 부인들이 이를 열어 자신의 자식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이를 대칸에 앉히기도 한다. 여느 왕조와 변함이 없다. 그러한 욕심은 끝내 화를 부르고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는다.

 

영화 몽골(2007)에서의 한 장면

 

그리고 오히려 오히려 몽골은 칭기즈칸 시절보다 그의 아들과 손자 시대에 더 무시무시했던 듯하다. 유럽정벌 시 1)남송 정벌 : 오고타이칸 아들 고추 사령관 2)고려 정벌 : 살리타이의 참모 당쿠 3)러시아 정벌 : 주치가 장자 바투와 베르케, 차이타이가 장자 무아투칸과 그의 아들 부리, 동생인 예수 몽케, 오고타이가의 장자 구유크와 코단과 카시, 톨루이가의 장자 몽케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부케. 그리고 백전 노장 수브타이 바토르 출전. 마침내 이들은 모스크바/블라디미르/키예프/헝가리/폴란드 함락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3대 구유크칸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이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책에서는, 그리고 영화와 중국 드라마(건원풍운, 한국 제목 : 칭기즈칸의 후예, 50부작)에서는 능력이 낮고, 소심하고, 비루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재위 2년 만에 죽는다는 것도 정사에서는 지나친 음주 때문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주치의 아들인 바투의 암살설도 힘을 싣고 있다. 소설에서는 바투의 동생 세이반과의 결투 중 죽는 걸로 소개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책 7권(181~210)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 수사가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9세대 보낸 편지에 몽골족의 세심한 생활상과 풍부한 지리적 정보가 장문으로 소개되어 있어 문헌적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훗날 기회가 되면 다시 내용적으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 몽골(2007)에서의 한 장면

 

이후 서하, 카라 키타이, 위구르, 호라즘, 금나라,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남송까지 정벌한 4대 쿠빌라이는 이제 전투에서 이긴 정복자가 아닌, 통치자로 남기 위해 다시 제국으로서의 정착을 시도하게 된다. 이때 카이드와 아리크부케와의 장기전도 펼쳐진다. 쿠빌라이가 정착을 시도해 제국 건설을 하기로 한 것도 이해는 된다. 이유는 분명하다. 유목민 근성으로는 광활한 지배 어려워 농경문화로 변화 조짐 수도를 대도(지금의 북경)으로 옮겨 남쪽 견제하고, 몽골 고원 반란 주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리크부케와 카이두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막내 위양 전통에 따른 아리크부케의 쿠빌라이를 향한 명분도, 몽골 고원 중심의 유목 강조(유목민 전통과 칭기즈칸의 대야사를 지키자는)를 했던 카이두 명분도 맞는데 역사는 그들을 반란군으로 묘사. 역시 역사는 승자의 관점과 기록이 아닐까.

 

영화 몽골(2007)에서의 한 장면

 

결국 최후의 승리는 쿠빌라이가 차지하고, 원제국을 선포한다. 이후 주원장의 명나라가 들어서고, 고원으로 쫓겨난 몽골족을 달래 누르하치가 정통성을 이어받은 척 한 후 청나라를 세운다(몽골의 칸과 누르하치는 밀약을 맺었다. 칭기즈칸 시절부터 사용하던 옥새인 전국지새를 후금에 물려주고 누르하치는 몽골 제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목으로 청을 세웠다). 하지만 몽골을 라마승 제도를 적극 지지하는 척하며 명예와 권위를 높여 몽골 남자의 1/3이 승려가 되어 몽골의 힘은 점차 약화됐다.

 

이로써 주치와 차카타이, 바투와 구유크,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카이두의 내전도 끝이나면서 책은 대장정을 마친다. 3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틈틈이 읽어 내려가면 오래도로 오르고 싶었던 등반을 마치고 하산한 기분이다. 다음엔 도쿠가와 이에야스(고려문화사, 전 6권, 1984년 발행)를 읽어 내려갈 차례다. < 이 하 >는 중간 중간 중요한 책의 대목이다.

 

 

< 이 하 >

 

"기다려. 그리고 눈을 돌리지 마라. 전력이 비슷할 때 싸우면 안 된다. 확실한 승기勝機가 잡히는 순간 활을 당긴다"

 

고르고나크 천변에서 몽골 부족회의인 쿠릴타이(만장일치제 회의방식)가 열렸다.

 

칭기즈칸의 이름 테무친은 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타타르족 무장인 테무친과의 전투 중 그를 사로 잡은 후 마지막 서로 안다를 맺고 그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목을 칠 때 동시에 정실인 호에른에게서 동시에 손에 핏덩이를 쥔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다. 그때 예수게이는 이를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테무친은 작은 힘이라도 모았고,비록 적이라도 충성을 한다면 한 편으로 끌어들였어. 테무친의 무서운 포용력과 친화력, 그건 초원 어떤 영웅한테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힘이었어. 나친이 김사영(이후 제베)에게 한 말.

 

 

젤메. 너는 내 상처의 독을 빨아 목숨을 건져주었다. 또 일신의 위험을 무릎쓰고 적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마유주를 구해와서 나의 타는 목을 축여주었다. 오! 가뭄의 단비 같은 젤메. 나는 너의 정성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옷을 벗고 다녀온 것은 좋지 않았다. 너는 위험에 처하면 항복할 수도 있었다. 네 마음 속에는 두가지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르추, 걱정마라. 우리는 방금 대단한 일을 하고 돌아가는 거다. 토릴칸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너무나 큰 것을 구했다. 무엇을 꼭 손에 쥐어야만 얻는 것은 아니다. 두고 봐라. 오늘의 이 만남으로 우리 장막은 단번에 열 배는 더 커질 것이다.

 

 

테무친은 보르추와 젤메를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했다. '이제 부지런히 안다(의형제)를 늘리고 군사를 훌련시키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나 하늘은 영웅이 될 사람은 한 시다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늘이 큰 임무를 맡길 사람은 일부러 시련과 고난 속에 넣어 단련시킨다고 맹자가 말했듯이 테무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웅은 마지막 승리의순간까지 줄기차게 달려나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운명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내려다본다.

 

 

테무친은 자신과 전 부족의 목숨을 보르테의 정조와 맞바꿨다. 테무친은 난감한 상황 속에서도 사태의 추이를 꿰뚫어보는 냉철함, 승리를 위해서는 아내까지도 버리는 비정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 서서히 피의 전사로 자라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적에게 미끼로 내던진 테무친. 당장 메르키트족과 싸움을 벌일 처지도 못 되었다.

 

 

고원에는 의義가 없었다. 그 옛날 테무친의 조상 보돈차르의 비겁한 술책이 길이길이 영웅시되었듯이 이 또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기는 게 진리고, 살아남는 게 도덕이며, 차지하는 게 인륜이었다.

 

 

테무친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상인만은 직접 만나 후하게 대접하곤 했다. 상인을 특별히 대하는 테무친의 속셈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테무친은 우선 상인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덕망 있는 지도자라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 토릴칸이 의부라는 소문을 퍼뜨려 쏠쏠하게 재미를 본 적이 있는 테무친은 상인들을 다시 이용할 계산이었다. 상인들은 고원의 곳곳을 돌면서 새로운 지도자 테무친의 존재를 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준비가 된 다음에 닥쳐오는 시련이라면 그것을 어찌 시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쾨쾨 텡그리는 나를 영웅으로 단련시키고자 하신다. 내가 이 전쟁에서 이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운명은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한때 '안다'였던 자무카와의 대전을 앞두고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 스스로에 속삭인 말.

 

 

칭기즈칸이 아주 망한느 것을 자무카도 원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응징하는 것이 목표였다. 칭기즈칸에게 자무카를 이길 수 없다는 극도의 패배감만 안겨주고, 군대는 그대로 남겨두어 케레이트의 단독 질주를 막아보자는 전략이었다.

 팽팽하게 삼국이 힘을 이어가면 오히려 평화롭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힘이 실리게 되면 독주가 이어진다. 사냥개는 사냥감을 적당히 남겨두고, 서로 삼국이 견제하고 동맹하는 것이 오히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된다.

 

 

자무카와 벌인 첫 전투에서 칭기즈칸은 깨끗이 패배를 자인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에게는 패배를 받아들일 줄 아는 큰 용기가 있었다. 장수로서는 승리하기보다 패배하기가 더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싸움에서 패배한 자신의 의지를 꺾고 아예 복수할 생각을 못하게 하려고 자무카는 잔인안 처형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무카의 오산이었다. 이번에는 칭기즈칸의 머리가 자무카를 앞섰다. 특히 상인들을 상대로 퍼뜨린 소문은 그야말로 천군만마 이상의 괴력을 발휘했다. 전쟁에서는 졌지만 명분에서는, 그리고 실리에서도 칭기즈칸이 승리하는 계기가 됐다. 자무카는 유목민들에게 점점 경악과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됐다.

항우가 포로의 극형에 처하며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고, 오히려 적국은 어차피 죽을 테니 결사항전하는 사태까지 하는 바람에 항우의 피해도 매번 만만치 않았다. 반면 유방은 칭기즈칸처럼 항복하면 다 받아주고, 백성을 위로하고 조세를 감면하는 등 유화정책을 폄으로써 인재를 등용하고 동시에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자무카의 잔인성은 부족민과 상인, 여행자의 입을 통해 고원 구석구석에 전해졌다. 고원의 여론을 형성하는 일쯤은이제 손쉬운 전략에 지나지 않았다. 승자인 자무카의 잘라이르 진영은 날로 사기가 떨어지고 험학한 분위기로 바뀌는 반면, 전투에서 완패를 당한 칭기즈칸의 몽골부는 하나둘 씩 귀부하는 유목민의 행렬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잘라이르의 병사로 이번 전쟁에 참여했던 씨족도 끼어있었다. 칭기즈칸으니 이때 민심을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사람을 다스리려면 먼저 그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평범한 이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칭기즈칸은 생각을 정리햇다. 토릴칸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는 것보다 그의 후계자가 되어 자연스럽게 통일을 이루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경쟁자인 자카 캄부를 없애야 했다.

 

 

10만 대군(이 군대는 수백년 후까지도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금나라의 1백만 대군, 남송의 60만 대군, 호라즘의 1백만 대군에 비교해 본다면 하찮은 병력이었다. 누구도 이 10만 대군이 세계를 점령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칭기즈칸의 이 10만 대군은 순수하게 몽골족 뿐만아니라, 여러 부족이 섞여있고, 매 전투마다 적국(금나라, 여진족, 거란족, 한족 등 책을 보다보면 종족 구분이 없다. 모두 많이 섞인다.)에서 항복을 받아 병사를 보충해서 싸우는 등, 아마 10만은 넘고 20만 내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이 20만도 기적이긴 하다.

 

 

고원 통일. 이 무시무시한 괴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학자들 : 여전히 심리학적 수수께끼다

모슬렘 사가 : 신의 저주다.

버나드스키 : 영적인 대폭발

허팅턴 : 유목 민족 주기설(고원 스텝 지대의 기온이 몇 백 년에 한 차례씩 급강하해 모든 초목이 말라죽고, 그에 따라 유목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배고픈 유목민들이 식량을 찾아 대규모로 남하하곤 했다는 것.

또 한 가지 가설 : 인구 조절을 위한 필연. 고원은 한정된 목초지기 때문에 한계치가 분명히 존재. 그런데 인구는 늘어남. 이때 약탈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 실제 책에는 어린 테무친이 자무카와 함께 황풍괴를 무찌르기 위해 고비사막으로 간다. 이것은 이 시기에 거대한 한발이 닥쳤다는 것. 즉 이상이변 증명. 그때부터 부족간 심각한 양상으로 전투가 벌어짐. 거의 타타르와 몽골은 부족의 운명을 걸 정도로 큰 전투를, 잘라이르부와 케레이트부, 메르키트부도 크고 작은 전쟁을 오래도록 이어감. 인구를 조절하고 식량을 해결하기 위한 본능적인 전쟁, 그것이 칭기즈칸의 고원 통일로 이어지는 원인의 하나라고 봄. 칭기즈칸 이후 몽골인의 인구 수가 결국 끝없는 전쟁 때문이겠지만, 줄곧 1백만 이내에 항상 조절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단순히 칸 보다는 중원의 황제 칭호에 상응하는 북방어 특유의 '카한可汗'이란 용어를 쓰기로 함. 이는 신라의 '각간角干'과 같은 뜻. 때문에 원래 고원 통일 후 칭기즈칸을 표기할 때는 '칭기즈카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음.

 

 

부족 서열이나 출신 지위가 아니라 개기인의 능력과 공로에 따라 관직을 줬다. 그래서 천호장 가운데는 평범한 부족민도 다수 포햄됐다. 양치기 데게이, 말치기 키실릭과 다바이, 목수 퀴취귀르, 대장장이의아들 젤메와 수부타이 형제, 소르칸 시라의아들 침바이와 칠라이 등이 임명됐다.

 

 

칭기즈칸은 점령지 나이만부로부터 국가 행정을 배웠다. 나이만부의 재상이었단 다타통가로부터 행정법을 배웠으며, 문자의 중요성을 깨달아 고원에도 처음 문자가 보급됐다. 이때 그의 네 아들을 비롯해 모든 처첩과 왕족들에게 나이만족이 사용하던 위구르 문자를 배우도록 함.

 

 

분쟁이 있어야만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힘이 넘치면 그 넘치는 힘을 어디론가로 흘려보내기 위해서도 전쟁이 필요하다. 또한 여러 부로 나뉘어 있던 부족이 일단 통일되면 그 다음은 정복사업을 펼쳤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된 부족을 통제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주들에게 땅을 떼어주고, 그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내도록 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사망 후 아껴둔 힘으로 일본을 꿀꺽하지 않았는가.

 

볼츠 : 말린 고기를 찧어 고깃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면 다시 몇 배로 불어나는 휴대용 전투 식량. 보급 부대가 늘 따라다니는 몽골군의 특성상 대부분 현장에서 양이나 소를 잡아 해결했지만, 추격전에 나서간 격렬한 전투를 벌일 때 볼츠를 먹었다. 이 전투 식량을 개별적으로 휴대했다. 대개 양고기 볼츠는 양의 심장에 담고, 쇠고기 볼츠는 소의 방광에 담았다. 습기가 5퍼센트 이내기 때문에 휴대 상태로 2년 동안 상하지 않았다. 이것이 또 하나의 대제국 몽골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칼 한 자루와 볼츠 주머니 몇 개를 말 안장에 매달면 몇 천리라도 달려갈 수 있었다. 기동력 우수. 

병사들은 강행군에 대비해 육포 '볼츠'와 미수가라(미숫가루의 원조가 되는 잡곡 가루), 마유주를 조금씩 지녔다.  

 

 

 

만리장성은 금나라를 지키는 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몽골을 지키는 성이 되었다. 진시황이 우리 같은 북방인이었다더니, 바로 우리를 지키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나를 위한 것이 오히려 상대를 위한 오판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 금나라는 만리장성 너머로 싸움을 걸지 못하고 지키기에 급급했다.

 

금나라 군사는 분명히 1백만이지만 그들은 넓은 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와 전쟁을 벌일 군사는 매번 4~5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은 무릇 대국적으로는 적을 무시하고, 소국적으로는 적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힘은 하나로 모으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뜻. 장기계획은 긍정적으로, 단기계획은 부정적으로.

 

다른 부족들은 겨울만 되면 목축조차 그만두고 움막에 숨어 들어가 간간이 수렵으로 양식을 마련하는 데 비해, 몽골인들은 기후에 적응하며 살아갔다. 그들은 겨울에도 목축을 하며 절대로 추위를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을 정복하며 사는 강인한 족속이었다.

 

칭기즈칸은 요양성 정복에 성공한 제베를 야율유가에게 맡기고 본대로 본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요양성을 점령한 제베가 거란군 10만, 여진수비대 5만, 제베 군단2만까지 합쳐 약 17만 군사로 독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면 작용한 것이다.

진시황도 왕전에게 그랬고, 유방도 한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칭기즈칸도 제베에게 그랬다. 

 

칭기즈칸은 전날의적이라도 일단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면 일점 차별없이 대햇다. 무칼리에게도 그랬고, 제베에게도 그랬다. 그만의 독특한 정책이었다. 그것인 칭기즈칸 자신이 메르키트의 핏줄일지 모른다는 한 가닥 불안감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 거란, 여진이 몽골과 한 핏줄이었다고 해서 딱히 핏줄을 따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족이든 호라즘의 모슬렘이든 가리지 않고 '사람'을 중시했다. 그래서 칭기즈칸 휘하에선느 이민족 출신의 맹장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었고, 석말야선 또한 그렇게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은 장수 중의 한 사람이 됐다.

 

 

 

칭기즈칸은 꿈 자체가 대단한 계시를 준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야율초재의 해몽을 듣고 자신에게 좋은 내용만 받아들이고, 대부분 야율초재의 해몽에 그럴 듯한 해석을 보충해 사람들에게 공표했다. 명분용, 여론용이었다. 여론을 만들어낼 줄 아는 칭기즈칸은 무당만이 아니라 역술가도 이용했다.

어린 테무친 시절 상인들을 잘 대우하고 이를 통해 자신에게 이로운 소문을 내도록 한 영민함이 곧 칸이 되어서도 여론을 만들어낼 줄 아는 영특함을 발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