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uman Storytelling

ABO식 혈액형 발견하다_칼 란트슈타이너 이야기

 

 

인류의 생명을 구한 그 세 글자, ‘A’, ‘B’, ‘O’

 

칼 란트슈타이너(1868. 6. 14~1943)

 

 

 

6월 14일. 세계 헌혈자의 날이다. 이날을 매년 현혈자의 날로 제정한 것은 ABO식 혈액형을 발견해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칼 란트슈타이너 박사의 생일을 기리기 위해서다. 그의 생일이 바로 1868년 6월 14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칼 박사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 혈액형을 분류하게 됐을까. 당시만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이 수혈 중 사망하는 사고가 속출했던 때였다. 이 분류법 탄생으로 인류는 많은 목숨을 구하게 된다. 칼 란트슈타이너의 당시 삶으로 들어가 보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심심풀이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있다. 바로 혈액형. 인터넷이나 방송에서도 곧잘 회자되는 것이 혈액형에 따른 성격분류법과 혈액형별 다이어트, 교육법, 직업선택법, 나아가 사랑법까지. 다양하다. 과연 신빙성 있는 사실일까. 과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낭설’이라고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선을 긋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300년 동안 이어오던 연구의 마침표 찍다

 

혈액은행의 존재이유는 단순히 주체의 ‘저축’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인해 피가 필요할 경우 누군가가 수혈한 피로써 이들의 생명을 치유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수혈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장장 300년 이상 걸린 실험의 결과물이라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시계를 17세기 후반으로 돌려보자. 1667년 영국 과학자들이 모종의 실험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 한 남자가 자신에게 수혈하는 것에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피가 아니었다. 당시는 사람의 몸에서 채혈한다는 의미가 전무했기에 동물의 피를 수혈한 것이었다. 그 남자는 곧 사망했고 실험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 남자는 곧 사망했고,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정부는 이 실험을 비롯한 모든 수혈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영국은 이 실험을 묵인했다.

 

1840년에 이르러서야 과학자들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수혈과 채혈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실험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 어떤 과학자도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 했던 터였다. 정부에서도 이를 막지만은 못 했던 이유가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기에, 이왕이면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점에 비중을 뒀기 때문이었다. 60년 뒤인 1900년. 마침내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한 과학자가 혈액에 대한 비밀을 풀게 된다. 바로 ABO식 혈액형 분류법을 찾아내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칼 란트슈타이너가 그 주인공이었다.

 

비엔나 대학의 연구조수였던 그는 어느 날 서로 다른 혈액을 이러 저리 혼합하다가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어? 왜 혈액이 굳어버리지?’

 

어떤 것은 굳고, 또 다른 것은 굳지 않은 현상에 주목하던 그는 집중적으로 이 실험에 몰두했다. 사람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수혈하니 적혈구가 용혈(적혈구가 파괴되고 안에 있는 헤모글로빈이 유출되는 현상)되면서 황달, 혹은 쇼크, 헤모글로빈 뇨증과 같은 부작용이 초래됐던 터였다. 그는 마침내 혈액형을 뭉치는 순서에 따라 A형, B형, C형 세 가지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응집현상이 없다는 뜻으로 C형이 O형으로 바뀌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AB형은 그 뒤로 2년 후인 1902년, 그의 제자인 드카스텔로(Decastello)와 스털리(Sturli)가 발견한 것이다.

 

 

 

 

당대의 혈액 개념을 뒤집다

 

1891년 비엔나 대학교를 졸업한 란트슈타이너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화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비엔나 대학에서 병리학을 폭넓게 공부했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혈액연구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의 혈액에 관한 연구는 1973년 록펠러 연구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의 헌신적인 연구업적은 수혈에 과한 다양한 연구는 물론 면역학과 의학에 걸쳐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해 보일 수 있는 ABO식 발견이었지만, 그가 이 연구로 혈액에 관한 비밀을 발견하기까지 수백 년 동안 이어져왔다는 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간 수혈 중 사망원인에 대해 ‘개개인의 병력 때문’이라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란트슈타이너는 이 점에 대해 시각을 달리 했다.

 

건강한 개개인을 연구해 사람 혈액의 특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한 개인의 혈청과 다른 개인의 적혈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응집의 다양성을 찾아냈고, 이 사실을 그의 논문에 각주로 사용했다. 이 각주는 의학사상 가장 유명한 각주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 실험 끝에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응집현상은 개개인의 병리현상과 건강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개개인의 고유한 혈액의 자연적 특성에 의한 것이다.”

 

이는 모든 인류의 혈액은 동일하다는 통섭을 깬 것이기에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 짧은 제안이 수많은 인류의 생명을 구했다.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은 법의학 분야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1902년 어느 범죄 발생 후 그는 혈액 응집 현상을 통해 혈액형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 또한 친부확인에 있어서도 당시에는 혈액형을 따를 만큼 유전학 발전에도 큰 힘이 됐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발견에 따라 장기이식 여부까지 판정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란트슈타이너는 1943년 연구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 손에 피펫을 든 채. 그의 단순한 세 글자 발견이었지만, 그것이 인류의 생명을 무더기로 구한, 최고의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