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의 힘
글을 쓰는 데 있어 묘사는 독자에게 신뢰감과 신빙성을 줍니다.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닌, 머리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줍니다.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원동력도 되고, 보다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1970년대 뉴저널리즘을 이끈 ‘월트 해링턴’은 “특정한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행동뿐 아니라 특정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이 좋습니다.
<패왕별희>, 유현종 저, 신원출판사
그렇게 글로 그려진 장면 하나하나가 콘텐츠를 풍성하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물과 직접 연계되지 않아도 주변 묘사로 얼마든지 당시 상황과 처지를 독자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흔히 우리가 글로 설명하지 말라고 할 때는 이런 식입니다. 내가 신이 되어 상황을 단정 지어버린다는 얘기지요. 가령 아래처럼 말이죠.
‘그는 소심하다’
‘그는 냉정하다’
‘그는 착하다’
‘그는 부지런하다’
이렇게 쓰지 말고 아래처럼 묘사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슬쩍슬쩍 선생님을 올려 쳐다봤다’
‘그렇게 김 과장은 나의 부탁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결제 기한이 하루 지났다는 이유로 내 기안을 거부했다’
‘아침 출근 때마다 모두에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최 부장님’
이런 묘사는 또 어떨까요?
악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요강 뚜껑으로 물을 떠 마신 기분이었다.
해안선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사랑엔 계산서가 필요 없다. 그러니 영수증도 필요 없다.
꿈은, 현실을 견디는 진통제다.
조지프 퓰리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엇이든 짧게 써보세요, 그러면 읽힐 겁니다. 명료하게 쓴다면 훨씬 쉽게 이해하겠죠”라며 “정작 중요한 건 그림처럼 써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문답니다”
묘사의 힘으로 판결을 뒤집은 사례도 있습니다. 1986년에 미시간 대학의 연구원 조너선 셰들러와 멜빈 매니스는 모의 재판에 관한 실험을 했습니다.
배심원 역할을 맡은 피실험자들은 가상 재판의 내용이 담긴 대본을 받았죠. 이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피고인 존슨 부인이 일곱 살 난 아들을 계속 양육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대본은 원고와 피고 양쪽의 주장에 거의 동등한 무게를 실어줬습니다. 단, 차이가 하나 있었다면 바로 각 진영 주장에 포함한 상세한 묘사 수준이었죠.
한 실험 집단에서 제시한 옹호 주장은 모두 생생하고 현실적인 수준으로 세부묘사를 한 반면, 상대 집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령 이런 식이었죠.
존슨 부인 옹호 집단 "존슨 부인은 아들이 자러 가기 전 이를 닦고 세수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다. 아이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베이더 칫솔을 사용한다"
이러한 세부 사항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 생생한 묘사가 포함된 변호인 측 주장을 들은 배심원들은 존슨 부인이 아이의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부묘사의 힘이죠.(<스틱>, 칩 히스/댄 히스 저, 엘도라도)
요즘 상당수의 매체가 내러티브 기사, 즉 동사와 묘사를 기반으로 한 읽히는 기사 생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한 동안 스트레이트 기사에 올인하던 워싱턴 포스트가 왜 내러티브 기사 생산에 주력할까요? 바로 시의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보만 전달하는 콘텐츠보다 공감과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 그 중심엔 바로 생생한 묘사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꼭 기억하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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