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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Storytelling

“똑똑한 친구들이 대기업과 고시만 바라보니까 문제인거야”

“똑똑한 친구들이 대기업과 고시만 바라보니까 문제인거야”

고영하 고벤처포럼/엔젤투자협회 회장

 

인생은 순류를 타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역류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가치판단에 따라 인생을 개척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해진 운명에 거슬러야 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리고 해석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이 나라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면, 나는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이 모든 물음에 ‘자신 만의 답’을 그린 사람이 있다. 그리는 과정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그저 의사가 될줄 알았다. 풍랑을 만나 정치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는 스타트업 발굴과 후배 양성을 위한 더욱 리얼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극본 없는 드라마라면, 이미 정해진 각본이라면 허탈할까. 아니다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정치원에 몸담았다가 하나TV 회장 역임 후 벤처 기업인들의 든든한 후견인을 자처하는 고영하 회장을 만났다.

 

“다들 끌고가!”

1974년 1월 21일 오후 연세대 의대 한 강의실. 유신헌법으로 학업이 중단되자 이에 대한 토론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그는 사회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을까. “우당탕탕”하는 파열음과 함께 경찰이 들이닥쳤다. 현장에 있던 의대생 120명은 줄줄이 굴비꿰듯 한방에 경찰서로 연행됐다. 한참 의사로서 꿈을 키워가던 혈기왕성한 대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그도 유신헌법에 맞섰다는 듣도보도 못한 거창한 죄목이었다. 법원은 그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그렇게 1년 1개월을 억울하게 옥살이 후 그는 출소했다. “난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잘못된 것을 잘못 됐다고 말했던 것 뿐.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같은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구한 운명은 그를 그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출소 후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던 생각도, 의사로서의 꿈이 또 엉뚱한 곳에서 막혔다. 당시 연세대 총장이 의대생들 복학을 허용했지만, 독재정부가 나서서 이마저도 차단시켰던 것. 독일에 있던 지인이 그에게 “독일에 와서 다시 공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역시 정부는 차일피일 미루며 그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왜 난, 눈앞의 길을 두고 이렇게 돌아서 가야하는 것일까? 난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정치인으로 제2인생, 그러나…


고벤처포럼 대표이자 엔젤투자협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하 회장. 최신 트렌드와 디지털 감각으로 중무장한 젊은이들의 창업정신을 뒷바라지하며 업계 최고의 멘토로서, 선배로서, 지성인으로서 오늘날 우뚝 서 있기까지 그에겐 이처럼 기구한 운명이 그와 함께 했다. 그 운명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오랜 기업운영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삶을 노니는 것도 운명의 노선을 거스를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저항이 아니었을까.


박정희 정권이 끝났다고 해서 다시 의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퍼상을 하면서 틈틈이 복학기회를 엿봤다. 의외로 사업도 성장했고 직원도 여러 명 채용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벤처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복학 시기를 재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이 무슨 또 변고란 말인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이어졌다. 신군부세력의 부당성을 고하던 그는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됐다. ‘잠깐이면 복학하겠지’ 싶었던 생각이 무심하게도 35년이나 훌쩍 흘러버렸던 것이다.


1988년, 그는 정치에 뛰어든다. 당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다투는 사이 어부지리로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주는 모습에 분통이 터져서다. 뜻을 맞춘 故 제정구 의원과 유인태, 김부겸 의원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민주당 공천으로 노원구에 출마한 고영하 회장은 92, 96년 연이어 낙마를 하게 된다. 특히 96년 선거에서 당선자는 4만2,000표, 고 회장이 4만여 표였으니 어찌 발길이 쉽게 떨어졌으랴. 그는 미련 없이 생각했다. “이 길도 내 길이 아닌가?”

 

 

“독재정권이 내 인생을 바꾼 셈이지”


그의 오뚜기 같은 반골(反骨) 기질은 이번에도 죽지 않았다. 그는 하나TV 회장으로서 다시 일어섰다. 그가 IT, 인터넷 업계에 뛰어든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앞으로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는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지체 없이 주변에서 IT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는 젊은이들을 손수 찾아 나섰다. 그들과 연을 맺으면서 함께 IPTV 비즈니스(셀런티비)에 뛰어들었다. 하나TV의 모태였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하나TV가 SK텔레콤에 인수되면서 그는 자신이 지금껏 겪었던 창업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군부시절에 시작된 그의 인생의 변화로, 비록 의사의 꿈을 이루진 못 했지만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운명을 탓하지 않고 긍정적인 철학과 도전, 실행, 시행착오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IT 업계 대선배로 후배양성에 언제라도 두 팔을 걷어 부치는 고영하 회장. 그가 세운 고벤처포럼과 엔젤투자협회는 그의 삶의 희로애락과 애정과 반성, 그리고 고학(苦學)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결정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두고 “가까이는 창업가를, 멀리서는 사회의 성장을 돕는 멘토”라고 한목소리를 낸다.


유신헌법으로 인생이 물길이 틀어진 그의 인생, 의사의 길을 걸을 줄 알았던 그는 장사꾼이 됐다. 또 정치인이 될 줄 알았던 그는 성공한 IT업계 든든한 멘토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뒤에서 성공적인 창업을 위한 멘토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의 변신은 끊임없는 고민에서 비롯됐다. 난 뭘 잘하는지, 무엇을 하며 인생을 뜻깊게 보낼지…. 그는 아직도 답을 찾는 중이다. 그래서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답을 찾는 여정일 뿐이라고 했던가. 분명한 건, 업계에 제2의 창업 붐이 일기 전부터 창업문화조성을 위해 고벤처포럼을 조직해 청년창업가의 애환에 귀기울여온 스타트업 멘토로 창업 생태계가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독재정권이 내 인생을 바꿨지. 난 이 길을 후회하지 않아. 더 열심히, 더 젊게 살 뿐이지”


종각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2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기자에게 존대를 썼다. 하지만 그가 늘 창업을 꿈꾸는 이들 곁에서 선배, 혹은 부모처럼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한다는 점에 착안, 기사는 편하게 ‘해라체’로 정리했다. 그것이 더 그의 진솔한 얘기를 현실감 있게 전할 수 있겠다 판단한 기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임을 독자 여러분께 양해 바란다.

 

 

 

*인간人間 고영하


-의사에 대한 미련이 많을 듯 합니다.
왜 없겠어. 난 어렸을 때부터 의사 외에는 생각 못 했지.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의사야. 가업인 셈이지. 아쉽지만 지금 인생도 나름 의미가 크다고 봐. 이게 내 운명이었을 거야. 아버지는 하루 종인 진료 때문에 바쁘셨고, 어머니 역시 종가에 시집오셔서 여념이 없으셨지. 난 혼자 컸어. 그러고 보니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못 한 것 같아.

 

-자료를 찾아보니 유신헌법에 반해 고초를 겪으셨던 것 같아요. 운동권 학생은 아니셨죠?
당시만 해도 그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 몰랐어. 난 운동권 학생이 아니야. 단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에 대해 “이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이 되느냐”며 분개한 게 전부야.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신 대통령이 말이 돼? 전국 대학생이 전부 일어서자 73년 10월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져. 하지만 의대는 예외였어. 그러다 74년 1월 21일 학교에 갔는데 수업 전에 학생 120명이 모여 “이대론 안 된다”며 우연찮게 토론을 했지. 내가 사회를 봤고. 경찰이 들이닥쳤고, 난 주요인물로 찍혀 10년형을 선고받아. 외국에서 지적을 하니 1년 1개월 만에 출소시켜주더만.

 

-후에 복학하지 않으셨어요?
왜 안 했겠어. 했지. 출소하자마자 연대 총장이 복학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정부가 그것까지 막았지. 괴씸죄로 총장도 쫓겨났어. 그래서 외국에 가서 공부하려던 찰나에 독일에 있는 지인이 와서 공부하라고 했는데, 여권마저 내주질 않는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그래서 안 해본 일이 없어. 포장마차도 해봤지. 그래서 오퍼상을 하게 됐어.

 

-오퍼상 하셨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 데요? 잘 되셨나요?
생각보다 잘 됐어. 나름 벤처였지. 그게 아마 77년이었을 거야. 직원도 여러 명 채용할 정도였으니 꽤 컸지. 다시 학교에 복학하고 싶었어. 그런데 1980년 5월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 이번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날 또 잡으려 하더라고. 도망자 신세가 돼버렸어. 아예 그들이 회사에 죽치고 있는데 방법이 없더라고. 이후 의사의 꿈은 영원히 접었지. ‘난 이제 뭘 하며 살아야 하나’하고 진지하게 생각했어. 하지만 난 뭘 해도 길은 있다고 봤고, 자신 있었어.

 

-꿈을 접는다는 건 정말 괴로웠을 텐데요.
그렇지. 하지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지. 88년에 정치에 입문하게 됐어. 故 제정구 의원을 비롯해 유인태, 김부겸 의원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어. 김영삼, 김대중이 사이좋게 양보하면 될 텐데, 둘이 싸우다가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권을 잡았잖아. 분통이 터지더라고. 하지만 이 역시 내 길이 아니었어. 이후 민주당 공천을 받아 노원구 지역에 92, 96년 출마했는데 떨어졌지. 96년 선거에서 당선자가 4만2,000표, 내가 4만여 표였어. 하지만 과감히 다른 길을 걸었지.

 

*멘토 고영하


-이후 하나TV를 창업하면서 IT와 연을 맺으셨죠? 포장마차, 유통사업, 그리고 하나TV까지. 이를 위해 오랫동안 돌아오신 것 같네요.
그것도 참 드라마틱해. 선거에서 두 번 떨어지고 나니까 생각이 많아졌지. 남은 인생 뭐하고 살지. 그러다 인터넷에 새로운 세상을 본 거야. 당장 주변에 IT 비즈니스를 하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IPTV 비즈니스(셀런티비)를 하게 됐어. 지금도 그들과 연락하며 잘 지내.

 

-고벤처포럼이 이렇게 스타트업 생태계를 위한 플랫폼이 될지 예상 못 하셨죠?
그럼. 처음엔 고작 8명이서 모였을 뿐이야. 하나TV가 SK텔레콤에 인수되고 나서 1년 정도 있다가 퇴사했지. 여기서 같은 고민을 반복하게 돼. 난 앞으로 뭐할까. 그때 내가 55세 되던 때였어. 인생 100세까지 산다고 하면 아직 반정도 남았으니까, 뭔가 뜻깊은 일을 또 찾고 싶었어. 그런데 다시 창업하긴 좀 부담스럽고, 내 경험과 인프라를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을 돕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지. 내 경험과 네트워크를 재활용하는 셈이었지. 주변 친구들은 산이나 가고, 바둑 두고, 여행가고 골프치는 데 여생 보내지만 그거 오래 못 가.

 

-젊은이들이 선뜻 만나 주던가요?
그래서 머리를 썼지. 당시 소프트뱅크벤처스 한국지사에서 ‘리트머스 프로젝트’라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거든. 거기에 참여한 7명의 젊은이들에게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밥을 사줄테니 모이자”고. 그들의 현실적인 얘기를 듣고 애로점을 상담했어. 그랬더니 그 수가 차차 늘더라고. 결국 지금의 2~300명 규모로 커진 거야. 이들의 현실적인 문제점과 어려움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인 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지.

 

-지난 5월에 광화문 KT 올레스퀘어에서 열렸던 고벤처포럼에 취재차 간 적이 있었거든요. 학생, 주부, 의사, 변호사 등 각계각층의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한 마디로 진화한 거지.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과 엔젤투자를 원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모여 하나의 창업생태계를 구축한 거야. 난 이런 모임이 많이 생겨나고 사회를 움직이는 한 축이 돼야 한다고 봐.

 

-엔젤투자가 벤처기업이나 투자자입자에서 상당히 필요하며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라고 보시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창업자에게는 초기 자금을 마련해주고, 투자자에게는 수익은 물론 사회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게 해주지. 엔젤투자는 벤처투자하고는 달라. 벤처투자는 기본적으로 ‘이 회사에 투자하면 3~4년 뒤 수익을 회수할 수 있겠구나’하고 성장가능성을 보고 투자해. 계량지표가 있지. 하지만 엔젤투자는 달라. 그런 지표 없이 천사 같은 마음으로 투자하지. 당장 스타트업이다 보니 매출과 이익을 알 수가 없어. 그저 미래 플랜만 보고 투자를 결정해. 매출과 이익을 안 보면 뭘 봐야 하지? 바로 ‘사람’이야. 그들의 품성과 비전, 노력, 철학, 인성, 리더십, 안목 등을 보고 판단하는데, 그 틀이 되는 것이 바로 ‘고벤처포럼’이야. 당장 여기 나와서 장기적으로 토론하고 파악하라는 거지. 때론 그 팀과 술 한잔 하기도 해.

 

-우리나라 창업문화를 진단한다면 어떤가요.
미국을 봐봐. 거기는 한해 동안 무려 20~30조 원의 엔젤투자금과 엔젤투자자 30만 명이 움직여. 엔젤투자협회를 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야. 2020년까지 엔젤투자자 1만 명, 투자금액 1조 원 조성이 목표지. 장기적으로 봐야 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 그러면 되는 게 없어. 효율성도 떨어지고. 엔젤투자는 한 10년 정도 기다리고 멀리 내다봐야 해. 그런데 VC는 길어야 7년 정도지. 보통 3~4년이고. VC는 자기들 돈이 아냐. 남의 돈을 운용하는 거니까 자신 마음대로 하질 못 하기 때문이기도 해.

 

-투자받지 않아도 된다면 받을 필요는 없는 거죠?
그것이 제일 현명하지. 최상책이야. 문제는 빨리 갈 생각 말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해. 카카오의 경우는 플랫폼 사업이기 때문에 투자금으로 빨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까지 바삐 뛸 필요 없어. 부작용 생겨.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건, 스타트업 초기에 ‘기업 DNA’를 잘 잡아야 해. 기업문화를 잘 만들어야 나중에 회사가 커지고, 돈을 벌어도 무너지지 않아. 이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진 스타트업 많이 봤어.

 

-보통 빨리 투자받고 싶어 할 텐데요.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것과 같아.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커. 투자받는 게 능사가 아니라 자신의 서비스 인프라를 어떻게 제대로 시장에 잘 안착시키는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해.

 

-정부의 대기업 R&D 지원부분에 대한 지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발전가능성이 큰 중소기업에 R&D 자금을 지원하거나 창업지원금으로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은데요.
정부도 투자와 창업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는 하고 있어. 그런데 아직 창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우리 사회의 메인이슈로 끌어올리지 못 하고 있지. 봐봐. 아직 대기업 중심의 산업경제가 이어지고 있잖아. 독일은 대기업에 일절 R&D 자금을 지원하지 않아. 그 돈을 중소기업이나 창업지원금으로 돌려야 해. 삼성, 엘지, SK…. 다 컸잖아. 걔들이 돈이 없겠어? 이대로 가면 미래가 없어. 대기업 무너지면 우리 경제 어떨까? 지금 노키아 신화가 무너진 핀란드가 어떻게 됐지?

 

-국가 기반산업을 독점하다시피한 기업이 흔들리니 국가 전체적으로 시장경제의 어려움이 우려되더군요.

바로 그거야. 노키아가 핀란드 GDP의 25%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만큼 어려움도 큰 거야. 일본도 우리나라와 같아. 대기업 중심이지. 소니? 샤프? 파나소닉? 모두 오래된 기업이지. 일본경제가 왜 어려울까. 내부에서 자발적인 혁신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래. 대기업은 절대 혁신이 일어나지 않아. 조직이 비해하면 관료화되고, 파벌이 생기고, 개인의 창의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이 돼.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은 가능해. 미국 IBM은 100년 되도 업계 선두를 고집하고 있어. 왜 그럴까? 꾸준히 스타트업을 인수해 내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혁신역량을 밖에서 조달받아 성장동력을 만들기 때문이야. 이것이 바로 오픈 이노베이션이야.

개방형 혁신이 잘 일어나는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지. 애플과 구글은 끊임 없이 작은 조직에서 혁신이 이뤄져. 그래서 꾸준히 조직을 잘게 쪼개. 스타트업을 비단 실패와 성공으로 이분법해 논할 것이 아니야.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버리고, 빨리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해.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은 능력 있는 스타트업 인수/합병보다 기술과 인재를 빼내기만 하잖아. 이래선 안 돼.

 

-그런 면 때문에 국내 대기업도 여러 번이나 혁신의 기회를 놓쳤죠. 코닥이 1975년 일찌감치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개발하고도 ‘필름시장 최강자’에 연연하다 소니와 후지에 추월당했죠.
안드로이드라는 벤처가 처음에 삼성 찾아갔는데 삼성은 거들떠도 안 봤어. 그것을 구글이 인수하잖아. 시리 역시도 처음에 삼성을 찾아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 이 역시도 결국 애플이 인수해. 개방적 혁신 철학이 없는 소니는 망했지. 삼성의 미래도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이번에 재선한 오바마의 캐치플레이스가 바로 ‘스타트업 아메리카’야. 여기에 국가 비전과 전략 등 모든 게 담겨 있다고 봐야. 그런데 우리 대선 후보는 어떻지?

 

-우리나라 학생들의 꿈이 대기업 입사와 고시에만 몰린다는 것도 문제 같습니다.
한국은 똑똑한 친구들이 창업을 잘 하지 않아. 대기업과 국가고시에만 몰려. 우리나라 교육 문제야. 그저 수능을 위한, 수능에 의한 성공방정식만 나열할 뿐이야. 사람은 저마다 가치관과 생각이 달라. 그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필요해. 미국은 봐봐.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빌 게이츠…. 그들이 바로 미국의 신성장동력을 이끄는 리더잖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해. 그 기반이 바로 엔젤투자야. 조건이 없거든. 그전 같으면 중산층 이상이 돈을 주식이나 부동산, 은행에 넣어뒀는데 이제는 이걸로 힘들어. 난 그들에게 엔젤투자를 권해. 1억 원을 1,000만 원씩 10곳에 분산투자해. 보통 지분 1%를 가져오거든. 그중 한 군데가 성공해 코스닥 상장하면 보통 1,000억 가치가 생긴다고 하잖아. 티켓몬스터에 엔젤투자한 노정석(현 아블라컴퍼니 대표) 대표도 그런 사례야. 나도 엔젤투자했고.

 

-기업감별사 제도 신설도 제안하셨죠?
이스라엘은 정부가 정부지원자금을 투자할 때 기업감별사가 심사결과를 참고해. 감별사가 스타트업 팀원들과 2~3개월 간 함께 지내면서 최종 팀을 선별하지. 그중 20%만 성공해도 투자금의 3~6배를 회수할 수 있어. 그 자금을 다시 스타트업에 재투자하는 거지. 이런 구조가 잘 정착돼 있어.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창업경진대회를 많이 여는데 제대로 성공한 기업이 없잖아. 제대로된 스타트업 발굴을 못 했기 때문이야. 나도 경진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많이 참여하는데, 난 점쟁이가 아니거든. 서류만 보고 단박에 어떻게 아나? 이런 방식은 충분히 손 봐야한다고 봐. 그것을 이번에 각당 후보와 중기청에도 넣었어. 나중에 보면 알겠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회장님의 인생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물론 행복한 삶을 사는 거지. 그동안 가정에 소중함을 많이 모르고 지냈어. 변명하고 싶진 않아. 그 점이 아내에게 제일 미안해.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 가정을 행복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기업가로 성공할 수 있어. 고객만족도 마찬가지야. 직원이 불행한데 어찌 이들이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겠어. 참, 한 가지 더. 창업을 희망하는 모든 분. 시계만 보지 말고 나침반을 잘 봤으면 해. 방향이 중요하거든. 고벤처포럼이 그런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니 와서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몸소 겪었으면 좋겠어.



본 기사는 허니문 차일드가 작성한 월간 웹 2012. 12월호 <trend maker>를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