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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침의 해우소

[No.28] '속도'라는 조용한 전염병

출근 시간입니다. 차분히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천천히 걷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오른쪽 칸에 몸을 맡깁니다. 왼쪽으로 지나가도 되는데 슬쩍 한 마디가 귀에 스칩니다.
'아이~ 바빠 죽겠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나와 지하철 개찰구에 다다르자 머리 위 디지털 모니터에서 열차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군중심리일까요. 저도 냅따 뜁니다. 2분만 기다리면 뒤이어 열차에 오를 수 있는데, 괜히 숨차게 탔나 싶기도 합니다.

 

꼭 시간이 '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초를 다투고, 뛰고, 재는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를 봐도 중간 광고 하나 지나가는데, 혹은 유튜브 5초 광고 지나가서 'Skip' 버튼을 누르기까지 그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바일로 시시각각 이메일을 확인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SNS 글을 남기면 댓글을 실시간으로 살펴봅니다. 조금 천천히 걸어도, 5초 기다리는 사이 좋은 생각을 하며 보내도 좋을 텐데 괜스레 급해지는 마음입니다. 하물며 라면 끓이는 3분도 길게 느껴집니다. 뚜껑을 열고 물만 부어서 바로 먹어야 직성에 풀립니다. 너무 빨리 처리하려 하고, 기다리기  힘들어하고, 회신은 빨리 받아야 하고, 밥도 빨리 먹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시간의 노예가 됩니다.

 

1800년대 초만 해도 베토벤의 콘서트는 장장 6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요즘 같아서는 그렇게 앉아 있지를 못하죠. 하물며 저는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을 보는 3시간도 정말 힘들었거든요.

 

가장 최근인 1980년대 중반에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 콘서트도 최소 두 시간 이상 지속됐다고 합니다. 오늘날 청중들은(저를 포함) 90분만 넘어가도  안절부절못하죠.

 

 

 

어쩌면 우리는 디지털 시대 속에 인스턴트 생활방식에 길들여진 것도 그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그동안 직접 두 손을 써가며 매달렸던 요리하기, 걷기, 독서나 대화, 편지 쓰기는 모두 패스트푸드, 운전, 채팅, 쪽지, 이메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전 길가에 종종 보였던 '디지털 사진, 1시간 완성'이란 문구는 이제 고루합니다. 3분이면 인화해야 하고, 아예 집에서 칼라 프린터로 출력을 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이런 가속이 정상적인 것인지 의문입니다.

 

갈수록 디지털 시간관리 기술이라는 강의도 속속 생겨납니다. 하지만 정작 강의를 들어보면 대부분 '집중력을 요하는 일처리 방법'이나 '주의력을 요하는 업무 효율적인 배분 노하우'입니다.

 

속도에, 빠름에 너무 길들여지다 보면 우리 영혼은 그 만큼 생각할 시간과 숙성시킬 기회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속도만 키우는 시대의 요구는 우리의 정신상태를 멀쩡하게 놔두질 않고, PC로 말하면 CPU를 하루 종일 돌리게끔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워치다 뭐다 해서 이제는 손목으로 실시간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사진 = 링컨과 더글러스. Greg Groesch 작. The Washington Times)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미 상원의원 스테판 더글러스는 끝짱 토론으로 유명했습니다. 1958년 8월 21일 일리노이주 오타와에서 맞붙은 토론에서는 더글러스가 먼저 1시간 연설하면, 이어 링컨이 1시간 반론하고, 다시 더글러스가 30분 반론하기도 했다네요.

 

두 사람은 그 전에도 몇 차례 맞붙어 침 튀기며 토론했는데요, 가장 최장 시간은 1954년 1월 16일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에서 더글러스가 3시간 연설, 링컨이 3시간 반론했습니다. 그러곤 해가 저물자 링컨이 청중들에게 한 마디 합니다.

 

"여러분! 벌써 해가 이렇게 졌군요. 집에 돌아가셔서 저녁 식사 후 다시 모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청중들은 모두 동의했습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이토록 오래 토론하며, 또 그 토론을 지켜볼 청중이 있을까요? 집에 가든지, 채널을 돌리든지, 아나면 뉴스 제목만 살펴보고 넘겨버리겠지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디지털도 좋고 아날로그도 좋습니다. 다만, 너무 빠름과 속도만을 중시하다 보면 그 안에서 반드시 우리가 잃어가는 소중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살펴보고, 챙기고, 여유를 갖고, 꼼꼼히 들여다보고, 천천히 먹고 걷는 것도 결코 손해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