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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침의 해우소

[No.27] 히틀러를 만든 남자, 폴 데프린트

 

 

독일의 나치 지도자이자 정치가인 아돌프 히틀러.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독일의 총통 자리에 오르기까지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경제발전을 빌미삼아 독일 국민을 선동하고 프로파간다 수법으로 대중의 감각을 마비시킨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의 웅변술은 이미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와 제스처, 음조에 대한 분석도 많이 나와 있지만 무엇보다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흑백논리법, 대조법 등으로 문법을 설계해 연설해 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홀로코스트라는 지옥을 설계한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 예로 그는 자신의 발성법을 위해 파울 데프린트(Paul Devrient)라는 오페라 가수로부터 1932년 4월부터 11월까지 교육을 받았다.

 

데프린트는 먼저 인간의 발성기관을 관악기에 비유하면서 힘을 쥐어짜지 않고 소리를 내는 것이 올바른 발성법이라고 히틀러에게 가르쳤다. 히틀러는 열심히 배웠다. 발성연습을 꾸준히 하며 첫 번째 수업에서 이미 호흡법을 개선했고, 성량도 늘렸다.

 

히틀러는 어느 날 연설회장에서 연설 중 갑자기 정전이 되어 연설을 중단했다. 홀 뒤쪽까지 목소리가 닿지 않았기 때문. 그날 밥 히틀러는 데프린트에게 물었다.

 

"마이크나 스피커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고 싶은데, 어느 정도면 그렇게 될 수 있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직업 연사는 목소리가 금방 소진됩니다. 노령의 배우가 이야기하거나 노래할 때 젊을 때와 다름 없이 힘 있고 윤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소리 내는 법을 열심히 훈련한 결과입니다."

 

데프린트는 또 히틀러에게 같은 내용을 매일 반복(프로파간다 수법)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연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정어를 아무런 감정 없이 발음하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데프린트는 "감정어들을 그 감적 내용에 적합한 울림과 색조로 발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합한 울림과 색조를 찾아 내어 그냥 그렇게 발음하기만 해도 그 단어에는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고 청중을 크게 매료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데프린트의 보수는 월 1,000마르크. 개인교습으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당시 관공서 과장급이 월 500마르크, 정부기관의 참사관이 월 1,200마르크였다고 함)

 

데프린트는 네 번째 선거전(1932년 7월 15일~30일)에서 발성법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제스처까지도 교정했다. "후보님의 경우 움직임이나 제스처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는데, 이럴 경우 청중에게 알랑거리는 것일 뿐입니다. 청중에게 중요한 건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데프린트는 연설 중에 히틀러가 지나치게 격앙되어 자기억제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부적같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후 히틀러는 ㄱ가방에서 은색 개목걸이를 꺼내더니 그것을 부적삼아 연습하기도 했다.

 

데프린트는 목소리 높이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맨 처음에는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크게 소리를 내야 할 때에 힘을 많이 모아 연설할 수 있습니다. 탄핵하는 목소리는 정적과 격정, 딱 중간 정도여야 합니다."

 

데프린트는 다섯 번째 선거전에서는 자세는 똑바르게 하고, 바닥이나 천장을 보고 말하지 않고, 옆 얼굴을 보이며 이야기 하지 않고, 한 번 제스처를 시작하면 문장이 끝날 때까지 제스처를 중단하지 않는다 등을 조언했다. 히틀러는 이 말을 듣고 "지금까지 당신에게 들은 지적 중 가장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이 같은 사실은 히틀러는 물론 데프린트 사후까지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데프린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이 아버지 일기를 1975년에 역사학자 베르너 마저(Werner Maser)에게 넘겨 출판하던 중 밝혀진 내용이라 한다.

 

 

* 이 책은 다카다 히로유키가 쓴 <히틀러 연설의 진실>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