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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디자인하라

[인터뷰를 디자인하라] 우물쭈물 묻다가는 큰일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요즘에도 어린이들이 많이 부르는 애창곡(?)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의 끝의 한 소절이다. 어렸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 했는데,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 연차가 늘다보니 이런 동요를 하나 듣더라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우물쭈물 하다가는 정말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기자라면 이렇게 개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우물쭈물 묻다가는 큰일납니다~"


기자 중에서 간혹 인터뷰 전에 준비를 철저히 했더라도 정작 인터뷰이와 만나 이것저것 가벼운 대화를 시작으로 얘기를 하다가보 정작 중요한 타이밍에서 질문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필자도 그런 경험이 많았고, 또한 그러한 후배기자도 많이 봐왔다. 왜 그런 것일까.


좋은 질문은 기자와 취재원 간의 대화에 탄력을 불어주는 촉매와도 같다. 서로 질문하고 답변하고, 그렇게 탁구처럼 주고 받아야 묻는 이도, 말하는 이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 받다보면 서로 통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가치관도 알게 돼 더욱 그 시간을, 그 자리를 즐기게 된다. 나아가 인터뷰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좀 더 털어놓을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인터뷰이는 방어적인 심리를 갖고 있다. 그 자리에 나오기까지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좋지 않은 뉘앙스의 질문을 아예 사전에 철저히 봉쇄할 생각까지 하기 나름이다. 반대로 말하면 인터뷰이도 사람인지라 '왕후장상 씨가 따로 있냐?'는 말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자신이 나쁜 일에 책임을 지기보다, 좋은 일을 자신의 공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본능이 있다. 또 자신을 평균보다 나은 사람이라 여기는 경향도 있다. 이를 '자기고양 오류(Self-Serving Bias. 자신을 좋게 보고 자신에게 생긴 일을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경향)'라 한다. 흔한 인터뷰이의 똑같은 심정이다. 


기자가, 인터뷰어가 이를 간과하지 못하고, 또 간과했다손 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타이밍에 맞춰 질문하지 못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데 앞서 이러한 질문조차 던질 생각을 아예 하지 못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글 실력을 좋은데, 왜 그걸까.



스스로 인터뷰이와 대등하다 생각 못할 경우


흔히 기자는 대통령보다 높지 않고 거지보다 낮지 않다고 한다. 이를 잊고, 모 대기업 CEO니, 유명한 가수나 탤런트이니 해서 스스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경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와 대등한 입장이라고 굳게 여겨야 한다. 독자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터뷰이와 대등하다고 여기지 못할 경우 돌아오는 증상은 한 가지다. 자신감이 퇴화되고 의지마져 소실된다. 하물며 스스가 '내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바보 취급 당할지 몰라'하고 생각하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자신이 하는 질문이 너무 기본적이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서 이런 것을 물으면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더 크게 갖는 것이다.


기본적인 질문이라도, 인터뷰에 반드시 필요하다면 하는 것이 맞다. 속으로 '사실확인' 절차라고 여기면 그뿐이다. 혹시나 '가만히 있으면 중간간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기자에게 있어 인터뷰 자리는 적어도 침묵이 금이 될 수 없는 자리다. 침묵은 태업과도 같은 뜻이다. 인터뷰이는 상대와 대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입장을 낮출 필요가 없다.



필요한 질문에 대한 오해는 또 다시 질문으로 푼다


때로는 질문 하나 하는 데도 '혹시 상대가 이렇게 질문하면 오해하지 않을까?'하고, 질문하기도 전에 걱정하는 사례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질문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칫 그 질문이 답변의 속도를 저지하는 브레이크와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명확하게 묻는 것이 필요하다.


'내 질문 하나에 상대가 기분 언짢아 하지 않을까?' 혹은 '내 질문에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보다 상대에게 더 큰 실망을 주는 것은 불확실한 기사가 여과 없이 틀리게 보도될 때다.


이러한 습성을 가진 기자는 혹여 조직에서도 상사나 동료가 틀린 지시를 내리거나 절차를 밟을 때 굳이 먼저 말해서 수정이나 개선을 택하지도 않는다. 혹시 내가 이런 건의를 하면 오해받을까봐, 나만 튀어보일까봐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기우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오해를 사는, 상대가 오해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또 다시 질문으로 풀면 된다.


"앞서 당신이 말한 당신의 사춘기 시절처럼 용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기 마련인데, 요즘 여성들처럼 성형수술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정색하며) 그 질문, 지금 나한테 하는 건가?"


"그렇다. 오해는 말라. 요즘 성형은 웬만한 여성들은 대부분 하지 않는가. 보편적 차원에서 물었을 뿐이다."


오히려 주의해야 할 점은, 인터뷰하는 동안 상대에 대해 감정적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에 빨려들어가는 순간 이미 나 자신은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어떨까. 내가 곤란한 질문을 했는데, 상대가 회피한다. 혹은 자리를 뜬다. 그렇다면 그 과정도 기사에 묘사함으로써 그 상대를 드러내 보여줄 수도 있다. 독자는 때론 본 라운드보다, 경기 직전의 신경전과 경기 후의 에피소드에 대해 더 열광하기도 한다.